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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Mar 02. 2023

산속의 작은 집. 그곳이 우리 집입니다.

셀 수도 없는 이사. 이제 정말 끝일까요.

우리가 외할머니댁에서 지낼 때

아버지는 연고도 없는 타 지역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잡고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구하신 일자리는 고물상에서 보조로 일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주말마다 아버지가 계신 곳을 다녀오시곤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때의 전 국민학교 3학년 2학기때였습니다.

작은 소형아파트의 방한칸. 그곳에서 엄마와 작은언니 저. 이렇게 넷만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큰언니는 그 당시 중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전학이 어려워 외할아버지댁에서 지냈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교복을 다시 맞춰 줄 여유가 저희에겐 없었던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생활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조금 걸어야 하긴 하지만 학교도 가깝고 학교친구들 동네친구, 언니오빠들과도 모두 잘 지냈습니다.

저녁 늦게까지 놀다 보면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불음에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집주인 이모님께서도 너무 잘해주셔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음에도 저는

가끔 그 이모님을 찾아뵙곤 했었으니까요.


1년 정도 별일 없이 우린 잘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집으로 전화가 걸려옵니다.

아직 서울에 있는 큰언니의 전화였습니다.

"외삼촌이 전화하면..ㅇ이ㅏㅓ리나어호 퓨ㅏㅓㅘ ㅁㄴㄹ"     뚝.

언니의 다급하면서 누가 들을까 작디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듣지 못한 채 전화가 끊어졌습니다.

'무슨 일인지?'싶던 순간 전화가 다시 걸려옵니다.

큰언니이지 싶어 얼른 전화를 받았습니다.

작은 외삼촌이셨습니다.

"언니가 주말에 엄마아빠 보러 가고 싶대서 내가 언니를 데려다주려고~ 집이 어딘지 주소 알려줄래?"

"아~네. 주소가요..."

주소를 열심히 알려주었습니다.

다시 집으로 전화가 옵니다.

"여보세요."

"내가! 외삼촌이 전화하면 모른다고 하라고 얘기했잖아~삼촌한테 주소 알려주면 어떻게 해!!

오늘 집에 빚쟁이들이 와서 주소안 알려주면 너네가 돈 갚으라고 하고 갔단 말이야!!

그래서 삼촌이 전화한 거야~나 데려다주려는 게 아니고!!!"


순간 머리가 멍했습니다.


가족이라 믿었던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나 봅니다.

우리 가족들이 고생을 하며 지내는 것을 엄마 동생인 외삼촌이 모를 리 없습니다.

빚쟁이들을 피해 많은 이사를 다니며 정착을 하지 못하고

어린 자식들과 아등바등 죽지 못해 사는 것을 외삼촌이 절대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찾아와 귀찮게 하는 것이 싫어 남일인 듯 고민도 않고 주소를 알아내 줘 버렸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정확한 주소를 모르는 어린 나는 이상한 주소를 알려주었고.

주소가 명확지 않다는 것을 안 외삼촌은 주소와 함께 내가 다니는 학교의 이름도 물어봤었습니다.


아마 이곳으로도 곧 빚쟁이들이 올 것 같습니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보다 그 크기가 크고 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곳을 선뜻 알려준 나의 잘못을 자책하며

우리가 또 이사를 해야 하는 것이 모두 내 탓인 것 같아 나는 가족들에게 알게 모르게 미안함을 품습니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버스로 30분 내려서 50분을 걸으면 저기 보이는 산 위에 우리의 집이 나옵니다.

시냇물을 따라 걷는 길에는 커다란 복숭아밭을 2개를 지나고 커다란 배밭을 4개는 지나야 합니다.

그곳을 걸으며 저는 수달을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계속 걷다 보면 우사도 지나야 하고 작은 마을도 지나면 포도밭이 나오고 그 밭 맞은편 언덕으로 오르면

산꼭대기에 우리 집이 나옵니다. 자연인이 사는 듯한 위치의 집입니다.

사슴을 기르는 산속 사슴농장 관리동이 우리는 집입니다.

그 집은 방 2칸의 조립식 가건물입니다. 화장실은 외부에 있었고 옆으로 작은 연못도 있었습니다.

옆쪽으로 마당도 널찍이 있었습니다.

시간에 맞춰 사슴 먹이를 가져다주는 조건으로 얻으신 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새벽 6시쯤 한번 오후 4시쯤 한번 이렇게 하루 두 번. 사료와 풀들을 챙겨줍니다.

도토리나무를 말려 네모 반듯하게 만든 커다란 여물을 흩트려 놓고 작두로 손가락 길이만큼 썰어

외발수레에 담아 사료와 함께 사슴에게 줍니다.

사슴들이 있는 우리는 4개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새벽녘 아빠를 도와드리며 사슴들 구경도 하며 그렇게 곧잘 따라다녔었고

가끔은 엄마와 아빠가 일로 바쁘시면 우리가 사슴먹이를 주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산 꼭대기에 위치하여 있는 사슴들 여물통으로 수레를 끌고 오르기는 조금 힘이 들었습니다.

겨울에 눈이라도 왔다 치면 수레를 끌기 어려워 언니와 저는 포대에 나눠 담아 대여섯 번씩

산을 오르며 나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부모님은 고물상을 직접 차리셨습니다. 고물상일을 도우며 일을 배워 아버지께서 작게 시작을 하셨습니다. 전국을 오가며 고물들을 사고팔며 돈을 버셨다.

일이 일정치 않은 탓에 부업의 개념으로 우리 부모님은 건넛마을 산 아래 땅을 빌려 하우스 5동을 짓고

영지버섯 재배를 시작하셨습니다.

일요일과 방학 때는 우리도 함께 영지버섯 농장에서 일을 도왔습니다.

고물상일과 버섯의 수확으로 우리는 점차 생활이 나아지는 듯싶었습니다.

사슴농장의 일도 이제 더 이상 하지 않고 우리는 농장 아래에 새로 지어진 주택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무렵 나의 늦둥이 동생도 태어났습니다. 맏아들집으로 시집가 아들 못 낳은 설움에 아들을 낳고 싶으셨던 건지 진짜 막내로 태어난 내 동생은 여동생입니다.


열심히 키운 영지버섯은 수확해 윗마을 건조기를 빌려 하루정도 건조를 시켜야 합니다.

건조 후 무게를 달아 판매를 해왔었습니다.

그날도 전날 수확한 영지버섯을 윗마을 건조기에 건조를 시켜놓고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내일 아침에 건조가 잘 된 영지버섯을 거래처에 납품하고 판매대금을 받으면 됩니다.

아침 일찍 전화가 한통 걸려왔습니다.

간밤에 말리고 있던 영지버섯이 아침에 가보니 몽땅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단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도둑맞은 것입니다.

우리에겐 남들이 살면서 겪을지 안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 왜 이리도 잘 일어나는 것인지..


아버지는 상심하시고 며칠을 술을 드시곤 하셨지만

그래도 아직 수확하지 않은 잔챙이 버섯들이 조금 남아있으니 그것이라도 돈으로 만들어야겠단 생각에

남은 버섯 수확해 건조기에 말려두었습니다.


아침에 엄마와 언니 나. 이렇게 셋은 버섯을 걷으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가는 길에 엄마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마지막 수확한 버섯들도 아침에 가보니 모두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뒤늦게 수확한 잔챙이 들이였고 그 양도 처음보다 현저히 작았지만 그 마저도 우리에게

큰 금액이었는데.... 그것마저도 다 도둑맞은 것입니다.

엄마는 전화기를 붙잡고 울면서 호소를 하셨습니다.

"그게 우리 집 마지막인데!! 그거마저 없으면 우리 집 애아빠 죽어요!!!"

그 모습에 우리 모두 울음이 터졌습니다.

나는 집에 계시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아빠! 엉엉!!!!"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울지만 말고 얘기해 봐!!"

"우리 버섯이 또 도둑맞았데요!"

"............."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엄마도 우시고 우리도 울고 앞으로 겪었던 모든 일을 다시 겪어야 하는 것인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울지 않고 묵묵히 계시던 아빠는 앉아서 담배한대를 다 태우시고는...

"괜찮아 다시 키워서 팔면 되니까 울지들 말아~ 큰일 난 거 아니야. 사람들 안 다친 게 어디야~그거면 됐어."

나중에 아버지께 들어보니 내가 엉엉 울면서 전화한 바람에 트럭을 몰고 나가 사고가 난 줄 아셨다고 합니다.

사고가 아니라 버섯들을 잃은 거라 생각하니 안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이런 생각이 드셨다고 했습니다.

'그깟 버섯을 잃은 것이 다행이다. 우리 가족이 온전히 다시 집으로와 정말 다행이다.

몸이 건강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정말 다행이다.'




이듬해까지 영지버섯농사를 짓다 정리를 했습니다.

아버지의 고물상이 이젠 조금 자리를 잡아 바빠지셨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떨어져 살던 큰언니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학교로 입학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 가족은 모두 함께 모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중학생이던 어느 날 밤늦은 시간.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길 잃은 할머니를 보호하고 있다며 얼른 오시란 연락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외할머니셨습니다.

치매 초기를 앓고 계셨고 딸 내 집에 간다면 옷 보따리 하나를 들고 길을 헤매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늦은 밤 엄마와 아빠는 할머니를 모시고 오셨습니다.

그날부터 우리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외할머니와 곧잘 친하게 지냈습니다.

동네에 작은 절이 하나가 있었는데 할머니는 매일 그 절을 다녀오시곤 했습니다.

그곳에선 여러 사연이 적혀있는 작은 손바닥만 한 책자를 주셨는데 월보처럼 주셨는데

할머니는 그 책을 매일 저에게 읽어달라 하셨습니다.

작은 책자이니 글씨도 조그맣고 할머니가 읽으시기엔 어려워 보이긴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가끔은 귀찮았고 '조금 있다가 읽어줄게~'하며 짜증도 내고 미루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니 할머니께서 책 한 권 읽어줄 때마다 2천 원씩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매일매일 그 책의 내용을 읽어드리다 보니 내용도 외울 정도였습니다.

귀찮기도 하고 놀고 싶기도 해서 책을 읽어 드릴 땐 여러 장씩 띄어 읽어드리기도 했습니다.

내용이 전혀 이어지지 않을 텐데도 할머니는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듣기만 하셨습니다.

다음 달이 되면 다른 책을 가지고 오시고 또 읽어달라 하시고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2천 원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어느 날은 왜 이렇게 이 책을 매일 읽으시는지 할머니께 여쭤봤습니다.

"내가 곧 죽을 텐데.. 죽으면 천국 가고 싶어서.."

라고 답하셨습니다.


그해 겨울. 11월 10일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가 위독하시던 날 밤. 온 가족이 모였습니다.

좋지 않은 모습이라 나를 포함한 어린 손자녀들은 다른 방에 있었습니다.

이모와 외삼촌들의 우는 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그때 막내이모가 할머니께서 찾으신다고 나를 부르러 왔습니다.

할머니를 뵈러 방으로 들어갔는데 죽음을 본 적인 없는 저는 무슨 상황인지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어른들의 다급함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른 할머니 손 잡아드리라며 저를 더 정신없게 만들었습니다.

말씀도 잘 못하시는 힘겨워보이시는 할머니는 제 손을 잡으시며

"고맙다. 고마웠다."힘들게 힘들게 말씀을 하시곤 제 손에 1만 6천 원을 쥐어주셨습니다.

제가 그동안 읽어드린 책 8권의 값을 한꺼번에 주신 겁니다.

할머니께서 한 번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셔서 받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고

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고 계시던 할머니가 조금은 위안을 얻으시는 듯 보여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 계속 읽어드린 거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돈을 받아야 하는지도 몰라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것도 실감 나지 않았고 무슨 일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감사함과 죄송함에 슬퍼지기도 합니다.

꾀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잘 읽어드릴걸. 짜증 부리지 말고 천천히 읽어드릴걸. 

후회가 됩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나로 인해 할머니가 잠시라도 편안함을 느끼지 않으셨을까

그게 내가 한 일이라서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우리 외할머니는 할머니의 믿음대로 분명 두려움도 없고 슬픔도 없는 편하디 편한 천국에 가셨을 겁니다.

손녀와의 작디작은 약속도 끝까지 죽음과 싸우시면서도 지키시는 그런 훌륭한 분이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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