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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Mar 02. 2023

새 학교 적응기는 너무 어렵네.

낯선 학교에 뚝 떨어진 작은 마음.

외할아버지댁으로 이사를 온 후 새 학교에 전학을 했습니다.


낯선 학교 낯선 친구들.

등교 첫날 친구들의 눈빛이 기억에 납니다.


그냥.

'이상한 애 하나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네.'


등교첫날 하는 자기소개는 여러 번 해봤기 때문에 어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매번 겪는 호기심의 눈빛과 비호감의 눈빛들이 익숙해지기가 어려울 뿐이죠.

이미 삼삼오오 친한 친구들이 짝을 맺고 있어

소심한 저는 어울리기 쉽지 않았고 자꾸 겉으로만 맴도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힘들여 친구를 사귄 들 또다시 전학을 갈 수 있단 생각에

친구 만들기에 애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내가 너희와 섞이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학교를 다녔습니다.


한 번은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했습니다.

축구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고 축구라는 운동도 생전처음 해보는 날이었습니다.

그냥 다른 아이들을 따라 우르르 달리기만 하다

하늘에서 축구공이 나에게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덥석 공을 잡아버렸습니다.

떨어지는 공을 잡았으니 친구들이 나를 대단하다 생각할 줄 알았는데

공을 왜 잡냐! 쟤 왜 저래! 얼른 내려놔!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이야기를 하는 통에

나는 내가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당황스러워 눈만 똥그랗게 뜬 채 얼어버렸습니다.

그렇게 계속 공을 잡고 서있는데 선생님께서 오셔서

축구는 공을 손으로 잡으면 안 된단 말씀에 그제야 공을 바닥에 내려놨습니다.

그날의 실수로 나는 더 소심한 친구가 되었고

친구들도 나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도 인사를 하지도 그냥 투명인간처럼 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친구가 없는 학교생활이 재미가 없었을 겁니다.

아침에 학교에 간다고 나와선 옆동네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우고

학교가 끝날 때쯤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할머니와 엄마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야채를 파셨습니다.

상점이 있었던 것이 아닌, 큰 봉지와 박스상자에 담아 놓은 오이나, 상추들을 매일 오전 밭에서 직접 사 오셔서 길바닥에 진열을 해놓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파신 겁니다.

아버지는 처가살이가 눈치가 보이신 것인지 일할 곳을 찾아 거의 집에 오시지 않으셨었고

아이 셋을 먹이기 위해서 엄마가 하실 수 있는 일은 노점에서 야채를 파는 일이셨을 겁니다.

그런 딸이 안쓰럽기도 하고 용돈벌이 겸 할머니께서도 함께 장사를 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학교가 끝나면 엄마와 할머니 옆에서 놀다가 먼저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엄마 옆자리에서 지네를 산에서 직접 잡아와 파시는 아주머니도 계셨습니다.

몸통은 검은색에 발은 붉은색의 생전 처음 보는 무섭게 생긴 지네였습니다.

이분은 매일 오시는 것은 아니고 지네를 10마리 정도 잡으신 날에만 나오셨습니다.

야채가 들었던 박스의 한쪽을 찢어 '1마리에 3,000원'가격을 적고 그 밑에는 지네의 효능을 적어놓으셨습니다. 관절에 좋고, 무릎에 좋고, 허리에 좋고, 풍에 좋고 등등 거의 만병통치 수준이었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지네를 500미리 생수병에 5마리 정도씩 나눠 넣어두고 뚜껑엔 숨구멍을 뚫어 꼭 닫은 뒤 검은 봉지로 둘둘 싸놓으셨습니다.

판매방법은 구매를 희망하시는 손님이 슈퍼에서 구매할 마릿수만큼 소주를 사 오십니다.(1마리 1병)

소주병을 열고 소주를 좀 따라 버리신 후 뚜껑을 열고 살아있는 왕지네를 긴 집게로 한 마리씩 잡아 소주병에 넣어주십니다.

소주로 퐁당 들어간 지네는 쓰디쓴 알코올에 들어가자마자 빙글빙글 꿈틀꿈틀 움직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질식인지 소주에 취한 건지 움직임이 없어집니다.

한 달 뒤부터 하루 한잔씩만 드셔라고 일러주십니다.

의외로 지네아주머니의 장사는 늘 일찍 마감하시고 퇴근이 빠르십니다.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장사를 나오시는듯합니다.

저는 지네아주머니가 지네를 소주에 넣는 것을 징그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다 파실 때까지 옆에서 구경하다 집에 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는 길에서 야채를 파는 아줌마딸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아이들은 나를 더 기피대상으로 여기는 듯했습니다.

안 그래도 투명인간 아이였는데 이젠 길에서 야채파는 가난한 집 딸 투명인간이 되었습니다.

"쟤네집 큰 집이던데~저기에 있는 2층집에 살던데?!"

"그 집 파출부로도 일하나 보지~"깔깔깔~

뭐라 해야 할지 할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고

가난한 건 맞으니 그냥 못 들은 채 하였습니다.


국어시간이 되어 사물함에 책을 가지러 갔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국어책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집에 갖고 갔었나 싶어 책 없이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책 안 가져왔으면 옆친구랑 같이 보면서 공부해~"

선생님의 말씀에 옆짝꿍은 억지로 책을 중간에 두었습니다.

국어시간마다 책이 없는 나는 늘 옆짝꿍의 눈치를 보며 수업을 들었습니다.

아니, 그냥 멍한 채 종이 치기만 귀를 쫑긋이며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내 국어책의 행방은 한 달가량 묘연했습니다.


잃어버렸던 국어책이 내 사물함으로 돌아왔습니다.

책은 갈가리 찢긴 채로 말이죠. 한 친구가 다가와 말을 합니다.


"미안해~처음엔 네가 싫어서 책을 가져가서 이렇게 만들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너무 미안해. 용서해 줘~용서해 주는 걸로 알게~미안."


나에게 한 이 사과가 진심인지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중요치도 않았고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멍하니 기계처럼 책을 챙기며 알겠다고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한 가지 정확한 사실은. 난 그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미움을 받고 있었다는 겁니다.

길에서 야채를 파는 가난한 집 딸은 미움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는 세계에 전 살고 있나 봅니다.

그날 저녁. 저녁밥을 먹은 뒤 집에서 찢어진 국어책을 투명 테이프로 붙이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누가 이렇게 했느냐 물으셨습니다.

"같은 반 친구가 그랬어~"라고 하는 동시에 참았던 울음이 터졌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내 책이 찢겨야 하는지.. 가슴 시리게 서러운 그날의 기억입니다.


다음날 엄마는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던 작은언니에게

우리 반으로 가 친구들을 혼내주라고 지시합니다.

저는 달갑지 않았습니다. 언니가 우리 반으로 오지 않았으면 싶었습니다.

저는 그냥.. 이 일이 없었던 일처럼 지나가길 바랐던 듯싶었습니다.


점심시간 작은언니가 반으로 찾아왔습니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책을 찢은 친구를 불러 언니는 듣기 좋게 타이르고 돌아갔습니다.


"다 용서하기로 한 건데 언니한테 왜 일러~아무튼 미안해~이제 그럴 일 없어~"


무언가 가시의 말을 한번 더 들어야 했습니다.


학교를 안 가는 날은 점차 늘어갔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등교를 않고 옆동네 놀이터, 뒷산 공원에서 시간을 홀로 보냅니다. 하교를 알리는 종소리가 날 때까지.


어느 날 학교에서 점심시간 이후 교실에 앉아있었습니다.

뒷문이 열리며 5학년 오빠가 나를 찾았습니다.

"여기 반에 OOO이라고 있어?"

처음 보는 오빠가 날 찾길래 의아해하며 다가갔습니다.

"정문에서 어떤 아줌마가 널 찾던데~ 학교 끝날 때까지 정문에서 기다린다고 나오래~"


하교시간이 되고 나는 정문으로 가 처음 보는 아줌마와 대면을 합니다.

"제가 OOO인데 누구세요?"

"어~아줌마는 엄마 친구인데 엄마 만나러 왔어~ 엄마한테 같이 가자."

아줌마와 함께 야채장사를 하고 계시는 엄마에게 갔습니다.

나와 멀찍이 떨어져 엄마는 그 아줌마와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분은 빚쟁이 중 한 명이셨던 겁니다.


며칠이 지난 뒤 우리는 또다시 외할머니댁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갑니다.

이번엔 서울을 떠나 어머니도 아버지도 낯선 도시. 멀리 멀리에 거처를 옮깁니다.


이전 05화 외할머니댁은 부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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