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안 Mar 02. 2023

외할머니댁은 부자네.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댁으로 갑니다.

우리 가족의 다음 거처는 

서울 고덕동에 사시는 외할머니댁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댁을 회상해 보자면.

큰 대문을 들어서 시멘트로 마감된 마당을 지나

네 계단 정도 오르면 집 현관문이 두 개가 보입니다.

그리고 계단 아래는 반지하의 집에 2~3개 정도 세를 주었던 듯하고.

보이는 두 개의 현관문 중 왼쪽에 현관문은 다른 가족이 셋방을 살고 있는 단층의 주택이 있었습니다.

오른쪽 문이 우리 외할아버지의 집입니다.

현관을 열면 신발장과 나무로 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바로 보입니다.

계단으로 올라가면 왼쪽엔 큰 거실 창이 'ㄱ'자 모양으로 나있는 거실이 있고, 

계단 바로 앞의 문은 외할아버지가 쓰시는 큰 안방이 있습니다.

안방 옆으로는 작은방이 있고 계단의 오른쪽에는 커다란 주방이 위치해 있습니다.

주방을 지나면 작은방하나와 그 옆으로 끝방이 위치해 있는 커다란 주택입니다.

주방과 작은방 맞은편으로는 거실로 갈 수 있는 통로의 길이 나있습니다.

끝방은 작은방들 중 가장 큰 방이었습니다. 그 방에는 아직 장가가지 않은 막내 외삼촌이 지내십니다.

우리가 처음 왔을 때는 작은방 두 개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막내 외삼촌이 결혼을 하며 출가를 하신 뒤부터는 이제 외할아버지댁 끝방 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외할머니의 주방엔 커다란 냉장고도 2대나 있고

넓은 'ㄱ'자의 싱크대와 6인용의 커다란 식탁이 있습니다.

옛날 내가 살던 집의 방 크기만 한 멋진 주방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그곳에서 매일 소고기가 들어가고 실고추로 고명을 올린 뭇국과 

많은 종류의 반찬들을 만들어주십니다.

태어나 처음 본 실고추가 신기한 저는 예쁘게 생겨 보여 그 매움을 간과하고

집어먹었다가 물! 물!! 을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외할머니는 다정다감하셨습니다.

우리를 항상 사랑으로 보듬어 주셨습니다.

치과에 정기적으로 다니기 어려웠던 환경이라 제때 이를 갈지 못하여

저의 치아상태는 무척이나 안 좋았습니다.

덧니들이 숭숭 나서 있었고 초기에 잡지 못한 충치들로 이가 많이 썩어있었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저를 데리고 치과에 다니셨습니다.

벌써 빠졌어야 할 유치를 뽑지 못해 덧니들 사이로 충치가 생겨 앞니는 송곳니로 변해있었고

초기에 치료하지 못했던 충치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외할머니와 가는 곳 어디든 즐겁고 재미있었지만 치과만큼은 무서운 동행이었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집에서 직접 쑥을 말려 쑥뜸을 직접 뜨셨습니다.

소화가 되지 않으실 때도 쑥 한 줌을 배에 올리시고 담뱃불처럼 불을 묻혀

뜨듯하게 쑥뜸을 뜨셨고, 무릎에도 허리에도 직접 쑥뜸을 뜨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매운 쑥 연기가 방안에 퍼졌고 한약방과 같은 냄새가 집안에 항상 남아있었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어린 저에게 민화토도 알려주셨습니다.

제 첫 도박의 길은 외할머니께서 열어주셨습니다.

집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민화토를 치며 놀았습니다.

어린 저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광을 좋아했습니다.

항상 다리밑에 비광을 숨겨놓고 제가 먹어온 척했습니다.

게임이 진행될 수 없는, 누가 봐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타짜의 속임수였는데

할머니께서는 단 한 번도 지적하지 않고 모른 척 넘어가 주셨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키도 크시고 무척 무서웠습니다.

목소리도 중저음에 볼륨이 크셔서 그냥 하시는 말씀도 꾸중을 하시는 것과 같아 저에겐 너무 무서웠습니다.

언니들과 놀다 크게 웃음소리가 나거나

거실을 어질러 놓으면 크나큰 목소리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마치 근엄한 무서운 마왕 같으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무서워 전 늘 곁에 가길 꺼려했었고 거실에서 놀다가 할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쪼르르 우리 방으로 도망치다시피 피하곤 했습니다.


외갓집을 회상해 보면 그 옛날 정겨움만 기억에 남은 것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도 눈치 아닌 눈치를 봐야 했었던 기억도 남아있습니다.


내가 어른이 된 이후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저에겐 3명의 이모들이 있습니다.

그중 둘째 이모의 말이 저에겐 아직 비수로 꽂혀있습니다.

아직 완치가 되지 않아 약을 드셔야 하는 엄마..

약이 없이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어 괴로워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런 언니가 안쓰러워 걱정하는 마음에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언니. 몸도 성치 않고 형부는 일도 못 구한 상태에 저 많은 애들을 어떻게 키우려고 그래.

그냥 애들은 고아원에 보내고 언니는 언니 치료받아!"


네.. 친이모 맞습니다. 그런 이모는 아무 생각 없이 저런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언니가 걱정이 되어 그랬나 보다 싶다가도.. 고아원에 갈뻔한 내 입장에서는 너무도 사무치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의 외갓집살이는 어린 나도 눈치를 본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불쌍한 듯.. 탓하듯 쳐다보는 눈빛과 답답함들을 분위기로 체감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전 04화 우리의 겨울은 가난하지만 따듯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