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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희 책여울 Jan 15. 2024

여름은 찬란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100쪽 분량의 짧은 소설이지만 책의 여운은 훨씬 짙다. 


"젖은 매트리스, 벽지의 남자애, 세 번째 빛, 양동이가 잡아당기던 순간, 아빠!" 

이 책을 읽으신 분이라면 이 단어들이 선사하는 감동과 아름다움이 떠올라 책을 다시 펼치고 싶을 것이다.


소설 속 소녀는 여름방학 동안 킨셀라 부부의 집에 맡겨진다.(버려진다는 느낌!) 아빠는 딸의 짐을 내려놓지도 않았고 이별의 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 가 버린다. 딸의 짐을 주지 않았음을 곧 알았을 텐데, 여름방학 내내 엄마나 아빠는 딸을 찾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다. 진짜 부모는 가짜 같았고 가짜 부모는 진짜 같아 그 여름 내내 소녀는 킨셀라 부부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제대로 대답하는 법, 책 읽는 법을 배웠고 무엇보다도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배우며 충만한 시간을 보낸다.


"그 여자가(말 많았던 밀드러드)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p.70


킨셀라 부부의 아픔을 타인들은 쉽게 이야기하며 수군거린다. 부부의 잘못이 아님에도 마치 큰 죄를 진 사람처럼 은근 무시하며 비난을 한다. 진짜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 선한 사람들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고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다섯 명이나 자식이 생기는 불일치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p.79


함축적이고 여백이 많은 글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페이지마다 뚜렷하게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 책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는데 제목은 <말 없는 소녀>다. 내가 생각한 장면처럼 아름다운 영상이 기대된다. 찾아서 꼭 보리라 메모해 놓았다.

                                                                                 

이 책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말없는 소녀>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물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p.96


소설의 배경이 된 1981년 아일랜드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보내는 여름은 평화롭고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오늘 하루를 사람답게 살아내는 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것인지 킨셀라 부부를 통해서 새삼 다시 느낀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책 읽는 사람들!


천안시 도서관 전체에 이 책은 대출 중이고 예약이 걸려있다. 얇은 책이고 누가 읽어도 저마다의 감상을 내놓을 수 있는 아름다운 소설이라 생각된다. 나는 각 챕터마다 제목을 적어보았다. 


1.킨셀라 부부 집에 맡겨지다.

 : 버려지다로 느꼈는데 지극한 보살핌을 주신 킨셀라 부부에게 실례되는 표현 같아 맡겨지다로 정했다.

2. 젖은 매트리스

3. 킨셀라 아주머니와의 시간들

4.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5. 세 번째 빛('벽지에 그려진 남자애'라고 썼다가 지웠다. 세 번째 빛은 감동이다!)

6. 엄마의 편지

7. 우물

8.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은 각자의 감상에 따라 또 다르게 더 좋은 제목을 지으실 것이다. 물론 나도 책을 다시 읽는다면 제목을 수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제목을 적고 보니 소설이 더욱 내 가슴에 꼭 쥐어지는 느낌이 들어 흐뭇한 맘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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