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만나는 일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우울감이다.
나에게 다가올 노년을 미리보기로 보고 있으니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욱 노년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는 글이나, 강연 등에 관심을 갖게 된다. 5가지, 7가지, 혹은 10가지로 정리해 놓은 내용들에 동감과 공감하고 때론 실감한다. 경제력, 운동, 친구, 취미, 배움,.. 등등
우리 치매 센터의 안내 데스크에는 92세 여자 어르신이 앉아 계신다.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전혀 개의치 않고 색칠을 하시거나 퍼즐을 맞추시면서 본인의 일에만 집중하신다. 예사롭지 않은 노쇄한 모습이 때론 밀랍 인형인가 싶을 정도로 흔들림이 없다. 책상 위에는 어르신 성함도 붙어 있다. 이곳을 두 번 이상 방문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 어르신에 대해서 궁금하게 되어 있다.
지금 치매센터가 있는 이 건물은 2년 전까지 만해도 주민센터였다. 그러다 주민센터가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한 이후에는 치매센터가 이곳을 사용하고 있다. 어르신은 주민센터였을 때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침 이 곳을 찾아와 몇 시간이고 앉아 있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중간문 앞에 어르신 전용 책상과 의자를 놓아드렸단다. 젊은 사람도 힘들다는 일자리 창출을 본인의 노력으로 일궈내신 셈이다. 그러다 치매센터로 바뀌면서는 책상과 의자를 아예 안으로 들여놔서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지내시게 되었다. 이 또한 엄청난 격상인 셈이다. 일자리 창출에 이어 내근직으로 승진하는 쾌거를 이루신 어르신을 진정한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라고 소개해도 될 거 같다
어르신은 자주 혼잣말로 노래를 부르신다. 분명 찔레꽃으로 시작했는데 아빠의 청춘으로 끝나고, 눈동자로 시작했다가 검은 장갑 낀 손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렇게 노래 앞 뒤가 자유자재로 조합되니 레퍼토리는 항상 무궁무진하다. 중간에 “짠짜라 짠짠” 셀프 반주까지 넣고, 신이 나면 작은 손동작으로 지휘도 하신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쑥스러우신지 껄껄 웃으신다. 먹을 것이 있으면 같이 먹자고 권하시고 칭찬을 해 드리면 고맙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신다.
어르신은 거의 모든 질문에 “모르겠다”라고 대답하신다. 묵비권을 행사하셔도 어르신의 삶이 어땠을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즐거운 노래 속에 슬픔이 깃들어 있고 웃음에도 애절함이 묻어 나오고 걸음걸이에서는 고단했던 세월이 투시되어 보인다.
그러나 지금 어르신의 행복지수가 낮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으니 어르신의 행복지수는 무척 높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기억의 많은 부분이 사라졌지만 구태여 기억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편치 않았던 지난 세월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적당히 기억을 소거하는 자발적인 치매를 선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행복지수를 산출하는 방법은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에 부합되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 행복해 보이는 경우를 종종 본다. 노년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갖춰야 할 덕목이 거의 없는 어르신의 평화로운 모습도 행복지수를 산출하는 획일적인 틀에 넣어서는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행복을 여는 자신만의 마스터키를 어떤 사연으로든 소지하게 된 것이라 추측해 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곧 치매센터가 한 정거장 거리의 다른 건물로 이전을 하고 이곳은 어르신들을 위한 목욕 시설이 된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어르신 걱정을 잠시 했었다. 그러나 어르신한테는 직장의 직종이 달라질 뿐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목욕탕이 들어오든 미장원이 들어오든 계속 그곳으로 출근을 하실 것이다. 지금처럼 노래 부르시고 웃으시고 작은 호의에도 고마워하시면서 즐겁게 지내실 것이다. 퇴근 시간이 되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집을 향해 지벅지벅 발걸음을 옮기실 것이고 다음 날 아침엔 또 출근을 하실 것이다. 어떤 척박한 상황에서도 행복이라는 자물쇠를 열어왔던 어르신만의 특별한 마스터키가 이번에도 신통하게 먹힐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