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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게 Nov 28. 2021

어르신의 화양연화


어르신이 인지교육 대상자로 결정이 되면 수개월 동안 댁을 방문하며 교육을 하게 된다. 

치매예방이 목적이기 때문에 되도록 좋은 기억을 떠올리실 수 있도록 대화를 많이 나누면서 수업을 진행한다. 산발적으로 들은 인생 이야기들을 이어 보면 마치 한 편의 소설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녹록지 않은 환난과 질곡의 세월을 사신 분들이라 행복한 기억을 꺼내드리기가 쉽지는 않다.  

좋게 시작한 이야기가 결국은 서럽고 힘들었던 기억으로 넘어가 버리기가 다반사이다.

그래도 결혼 이야기를 나누면 가장 행복하시지 않을까 해서 자주 꺼내 보게 된다.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하던 시절에 참으로 드물게 연애결혼을 하신 분도 계시다.

잘생긴 동네 청년이 어르신 주변을 계속 맴돌고 조카를 시켜 연애편지를 나르게 하더니 

급기야 결혼 안 해주면 죽겠다며 동네 떠들썩한 구애로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상상해 보니 언젠가 보았을 법한 TV 드라마 같기도 하다. 그러나 뜨거운 연애의 대가는 혹독해서 결혼 후에 군대에 간 남편을 대신해 돈 버시랴, 아이 키우랴, 또 시동생들 거두랴 고생하셨던 사연들을 실타래처럼 풀어 내신다. 결혼은 '폭탄을 들고 불구덩이로 뛰어든 것이었다'며 그때를 회상하신다.


집안 곳곳에 먼저 세상을 등지신 할아버지의 사진을 비롯해서 구둣주걱, 머리빗, 손 때 묻은 작은 소품들마저 먼지를 소복이 얹은 채로 그대로 남아있다. 

꿈속에라도 한 번쯤 나타나 줄만도 한데 도무지 나와 주지 않는다며 야속해하시는 어르신 눈가에 

그리움이 남는다.     


색종이로 신랑 신부의 모습을 접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혹시라도 오늘 밤 어르신 꿈속에 불현듯 찾아와 주시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이미 여러 차례 들어서 외워버린 이야기지만 마치 처음 듣는 것 인양 

귀 기울이면서 어르신과 사랑스러운 신랑 신부 모습을 접어 보았다.

      

불타는 로맨스에 꽃다운 처녀의 꿈도 청춘도 다 타버렸지만 

그래도 그때가 어르신의 가장 행복했던 화양연화였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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