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와서 심심치 않은 표현에 몸서리 쳐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예사롭지 않은 욕설과 천박스러운 결기가 곧잘 포장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상암동으로 출근하면서 어렵지 않게 격한 내용의 플랫카드를 만날 수 있었다.
"소각장 유치를 결사 반대한다."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라는 표현의 글귀는 예삿일이 되었다.
"폭주하는 도시를 점령하라"
물론, 이런 혐오적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결사니 뭐니 했었으면 추오도 지금 살아 있을 리 만무하다.
의견의 개진이나 그에 합당한 표현은 과한만큼 독약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행위이다. 본인도 인근에서 주거하며 직장생활을 하는 마당에 근처에 소각장이 들어서는 것을 찬성할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근자에 우리 주변을 떠도는 플래카드 글귀는 민망할 정도로 쌍스럽기 그지없다. 총선을 앞둔 국회의원 후보자들이 내건 캐치프라이어는 상대방 또는 상대당 비방 일색이다. 그러므로 이런 행위는 선거 포기를 극대화시키고 지나는 행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도 남았다.
"선생님! 독재가 뭐예요?"
"엄마! 저 아저씨들은 왜 남을 욕해?"
아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이 궁색하다.
플래카드 곳곳에는 욕설과 공격만 난무하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저녁 뉴스를 보는데 아들이 물어본다.
"저 사람들은 왜 맨날 싸워?"
거리의 프랫카드(사진 윤기경)
이 사회를 정직하게 또는 천박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정치인이며 권력자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 매스컴들은 그들의 촌극으로 특집기사를 쓰기 때문이다. 가장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은 남을 깎아내리는 것을 거들거나 기사화시키는 건지 모르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인성
그런 영향인지 우리 주워에는 "필사"니 "결사"라는 표현을 남용한다. 그들은 절대 죽을 마음이 없다는 거 알고 있지 않는가? 오늘도 상암동에는 수십 수백 장의 플랫카드가 바람에 출렁이고 있다. 간신히 버스를 타고 빈자리에 앉아 밖을 보았다..
"목숨 바쳐"라는 표현의 플랫카드가 언 듯 눈에 띄었다. 보훈처에서 순국선열을 애하며 "그들이 목숨 바쳐 지킨 나라"라는 표현을 쓴 플랫카드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소각장 반대를 위한 글귀였다.
그렇다면 목숨을 바칠 요량이라면,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차선책이라고는 타 지역이 감수하는 방법일 텐데 그것 또한 불가능하므로 대안이 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죽기를 무릅쓰고 쓰레기를 배출하지 말아야"하는 것이 온당한 표현이 낼까 싶다. 과도한 표현은 오히려 그 의사전달의 의지조차 스스로 꺾는 일이 될 것이다.
도심의 아침(그림 윤기경)
아이들을 위해 생각하라
왜 이렇게 우리는 과격해진 걸까?
집단이기? 아니다.
사회지도층의 탐욕? 아니다.
죽음으로 외치면 이뤄질 것이라 생각하는 막연함인지도 모른다. 국회의원조차 기관장조차 반대하는 소각장에 대한 대안 없이 서로를 비난하는 이 무모함.
그 속에서 어느 초등학교 앞 건널목에도 여지없이 "결사"니 "죽음을 무릅쓰고"라는 표현의 플랫카드가 아이들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설마 아이들에게 생명 경시를 가르치려는 건 아니겠지 싶다.
플랫카드도 전략이다. 나의 뜻을 올곳이 전달되도록 하려면 생각의 틀을 바꾸고 온전히 내 잘못 또는 약점부터 보완하는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