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플 때, 엄마한테 전화하면 바쁘셔서 전화도 못 받으니까 투정도 할 수 없어요.물론 엄마는 배고플 때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카드를 주셨어요.차가운 냉기가 가득한 캐시카드를 물끄러미 쳐다봤어요.
"카드엄마, 뭘 먹으면 될까?"
그때였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거 먹으면 되잖아."
웬 바람이 달콤한 음성으로 귀를 만지는 기분이었죠.
"그래도 될까?"
나는 허공에다 대고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붕붕 아니 앵앵하는 소리처럼 그건 작고 아담한 대화가 되었어요.
"마음먹으면 비싼 것도 사 먹을 수 있잖아."
바람의 요정이 분명해요.그렇지 않아도 혼자 뭘 먹는다는 것이 외롭고 심심했던 차였는데 잘 된 거죠.
"그럼 같이 가자."
나는 한 줄기 바람을 데리고 가장 먹고 싶었던 짜장면집을 가요. 사실 짜장면은 금지령이 떨어진 음식인 걸요.엄마는 짜장면은 건강에 해로우니까 먹지 말라고 했거든요..일주일 전쯤엔가? 같은 반 김주아랑 짜장면 먹었는데, 주아가 배탈이 나서 병원에 실려 갔었어요.그때, 주아가 나랑 짜장면 먹었다는 소문이 동네방네 소문이 나버렸어요. 그 일이 있은 후에 엄마는 더 강하게 짜장면을 먹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에휴, 제일 좋아하는 짜장면."
목구멀까지 차오른 짜장면에 대한 식욕이 풀리는 순간이었어요.나는 악어라도 쫓아오기나 하는 것처럼 중국집으로 내뺐어요. 우선 엄마가 여기 없어야 하고, 엄마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안되니까, 자라목을 늘뜨려 중국집 안을 두리번거렸어요.
"뭐해?"
바람은 내 등을 떠밀어 자리에 앉혔죠.
"뭐 먹을래?"
"응, 나 짜장면 먹을 거야 너는?"
"나?"
아차, 바람이 아니라, 중국집 아저씨가 물을 따라 주며 물었던 거예요.
"내 각정 말고 학생이 먹을 걸 얘기하면 돼."
아저씨는 한번 너털웃음을 뱉고 말했어요.짜장면은 참 맛있었어요. 바람이 옆에 앉아 먹지도 못할 거면서 '후루룩후루룩' 하며 소리를 내는 바람에 내가 먹는 속도도 빨라졌어요.
'얼른 가자."
그러고 보니, 바람이 서두르는 게 수상했어요.아까부터 어딜 급하게 데려가려고 하는 낌새가 있었어요.등을 떠밀어 의자에 앉힌 것이나, 후루룩 소리를 내던 걸 보면요.
"어디 가려고? 나 학원 가야돼."
바람이 나를 보고 겁쟁이라고 했어요.
"네가 가장 먹고 싶었던 짜장면을 먹었잖아."
"그래서?"
"그럼, 이번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놀이를 하면 되는 거야."
그건 맞는 말이었어요. 나는 놀이를 가장 좋아하지요. 놀이란 다름이 아니에요. 노는 거예요.
노는 것처럼 행복한 게 있을까?(그림 윤기경)
"그래도 될까?"
"왜?"
"엄마와 약속을 했으니까."
"엄마는 여기 안 계시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까 짜장면을 막을 때도 안 계신 거잖아."
"그랬지."
"그러니까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야?"
맞아요. 엄마만 여기 없으면 되는 거지요.엄마와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고자질할 사람도 없으니까요.짜장면 먹고 배탈났던 김주아도 여기엔 없으니까요.그렇다고 내 편이 된 바람이 고자질할 리는 만무하잖아요?그러고 보면 오늘 짜장면을 유달리 맛있었어요. 바람이 훌훌 불어준 덕택일 수도 있지만, 몰래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는 거 같아요.
예전에도 혼자 몰래 먹던 것들은 유별나게 맛있기도 했어요.냉장고에 있던 누나의 감자칩을 훔쳐 먹을 때도 그랬어요.엄마가 아끼던 꿀단지를 조금만 조금만 하다가 다 업어 치울 때도 그랬어요.
아 근데, 중요한 게 하나 있어요. 아직도 엄마는 찻장에 있는 꼴단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 줄 알아요.
언젠가 터질 불호령 때문에 사실은 찻장에 있는 빈 꿀단지를 볼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에요. 하지만, 금방 잊어버려요. 빈 꿀단지를 ㅂ지 않으면 나는 정말 간 큰 아이거든요. 바람을 따라 들어온 숲은 바깥보다 훨씬 덥지도 않았어요. 냄새도 마음에 들고요.
"아, 좋다."
"후회는 없겠지?"
"응 엄마가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럼 뭐 하고 놀까?"
"네 생각은 어때?"
"음......."
걱정이예요(그림 윤기경)
바람은 '휘일 휘잉' 하며 한참을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건 오래지 않아 해결됐어요. 우리는 곤충과 술래잡기를 하기로 했어요.
"내가 옛날부터 사귀던 베짱이를 부르면 돼."
"그래 잘 됐다. 빨리 불러 봐."
"알았어."
바람이 베짱이 울음소리를 흉내내면 곧 베짱이 친구가 나타날 거라고 했어요.나는 한껏 기대했어요.
한번도 베짱이와 만난 적이 없거든요.
"츠츠츠츠츠"
조용했던 숲이 재미난 베짱이 울음소리 흉내로 메아리가 울렸어요. 그렇지만 바람의 생각대로 베짱이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어요.
"치르릇 툭 치르릇 툭"
급한 바람이 더 빠른 울음소리로 ㅇ내를 냈지만 어림도 없었어요.
"이상하다. 어제도 많았는데."
바람이 웅웅 소리 내서 우는 거 같았어요.바람이 또다시 베짱이 울음소리를 흉내 냈어요. 그때였어요. 어디선가 "츠츠츠"하며 베짱이가 화답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였어요.
"와 잘됐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좋아라 했어요.
하지만 너무 먼 데서 들리는 베짱이 소리인지,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한동안은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