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귀신탐정 권두칠

by 바람비행기 윤기경

서울 종로의 한 퇴직경찰 모임 장소.
권두칠은 회색 코트를 걸친 채 조용히 명단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기억 제거 협조자 목록 – 1차 외부접근 파일]
그 안에 쓰여 있던 이름 중 하나가 그를 오래도록 멈춰 세웠다.

김형섭 – 前 강력반 수사관. 현재: 보안기록센터 자문위원.

그는 권두칠이 가장 믿었던 과거의 파트너였다.
하지만 10년 전, 돌연 사라졌고, 그 후 누구도 그의 근황을 알지 못했다.

그가 ‘기억 제거’와 관련된 비밀 조직과 엮여 있다니.

“설마… 너도 알고 있었던 거냐. 내 손녀가 사라졌다는 걸.”

그날 밤, 두칠은 남양주 외곽, 은퇴 형사들이 머문다는 비공식 요양소로 향했다.

장기 입소자 명단 중 ‘김형섭 – 기억장애 진행 중’이라고 적힌 기록이 있었다.

그는 조용히 형섭의 병실을 찾았다.

방 안은 조용했고,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엔 분홍색 머리끈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작은 녹음기.

“형… 혹시 날 기억하냐.”
“손녀… 가을이, 그 아이… 네가 지웠지? 아니면… 보고만 있었던 거냐.”

그 순간, 침대 위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흰머리, 주름진 눈가,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가을이…? 아… 그래… 네가 찾을 줄 알았지.”

형섭은 조용히 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그 아이… 귀신이 아니라, 목격자였어. 우리 모두 봤지. 감당 못 할 걸 본 거야.”

“그래서… 아이를 지운 거냐?”

“아니. 우린… 선택한 거야. 세상을 위해, 아이 하나쯤… 사라져도 되는 쪽을.”

두칠의 주먹이 떨렸다.

“그게 너희가 말하는 정의냐?”

형섭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정의가 아니라… 생존이었어. 우리가 보고 들었던 진짜 이름들. 그 사람들은 법 바깥에 있었어.”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건넸다. 거기엔 단 한 문장.

“진짜 책임자는 아직 거기 있어.”

장소: 관악구 과거사기록보관소 – 지하 보존실 G-7

형섭은 마지막으로 두칠에게 말했다.

"난 선택했고, 넌 이제 되찾아. 단… 그걸 찾는 순간, 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 너라면 반드시 찾아왔을 거라 생각했다.”

김형섭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수척했지만,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려는 자의 체념이 담겨 있었다.

권두칠은 말없이 분홍 머리끈을 들어 보였다.

“이게… 네가 덮은 기억의 조각이냐?”

형섭은 피식 웃었다.

“기억이란 게… 불편하잖아. 그 애가 본 건, 그냥 한 장면이 아니었어. 판을 흔들어버릴 진실이었다.”

두칠은 녹음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할아버지… 저는요, 아무 말 안 했어요. 그냥, 그 사람들 따라간 거예요. 근데… 자꾸 잊으라고 해서…
무서웠어요.”

“아저씨가 오면, 다시 말할 수 있을까요?”

형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아이는 용서받을 수 없을 걸 봤어. 근데 그걸 말하게 둘 순 없었지. 나라가, 사회가, 조직이 애 하나 때문에 무너질 수 없었거든.”

두칠은 다가가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래서 기억을 지웠냐? 내 기억에서 손녀를 빼내고, 아이를 시스템 속 오류로 만들었어?”

형섭은 힘없이 말했다.

“넌… 그날도 내 편이 아니었지.”

그 순간. 두칠의 눈에 파일 하나가 들어왔다. 서랍 속에 감춰져 있던 봉투.

“고위직 삭제 대상자 목록 (1차 교차 판별자)”

맨 위에 적힌 이름. 권두칠 (전직 수사 1과)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형섭을 바라봤다.

“나까지… 지우려고 했던 거냐?”

형섭은 천천히 대답했다.

“우린 널 못 믿었어. 넌 끝까지 파고들었지. 그 집요함이… 결국 아이를 건드리게 했어.”

두칠의 얼굴엔 깊은 절망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절망은 곧 결의로 바뀌었다.

그는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 코트 안에 넣고 말했다.

“이제 알겠다. 귀신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진실을 묻으려는 산 자들이었어.”

형섭은 마지막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하 보존실 G-7. 너와 가을이의 마지막 연결고리가 그곳에 있다.”

두칠은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비가 창문을 때리며 리듬을 만들었다.

“다녀오마. 난 이제 귀신보다… 살아 있는 너희들이 더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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