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고, 골목은 다시 숨을 고르듯 조용해졌다.
권두칠은 방수천을 걷어내고, 책상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낡은 수첩을 꺼냈다. 이 수첩은 그가 은퇴 전 마지막 사건을 맡던 해부터 들고 다니던 것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펼친 첫 페이지엔 붉은 볼펜으로 동그라미 쳐진 이름 하나가 있었다.
‘정해용 - 실종 사건 - 1999년 7월 3일’
그 아래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힌 메모가 있었다.
“끝내 못 찾은 아이. 광흥동 철길 아래.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바로 전날, 현장에서 본 낯선 마크가 해용이 실종 당시 발견된 낙서와 흡사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망설임 없이 수첩을 꺼내 확인한 것이었다.
“맞아… 저건 해용이가 그리던 문양이었어. 친구들이 말하길, 해용이는 맨날 그 문양을 ‘숨겨진 문’이라고 불렀다지…”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 익숙한 목소리가 낮게 말했다.
“두칠 형님… 오랜만입니다. 아마 저, 기억하실 겁니다. 그 날 그 철길 옆에서... 같이 있었던 놈입니다.”
두칠은 몸을 일으켜 거울을 바라봤다. 세월이 지워지지 않은 눈빛만이 살아 있었다.
“그래, 기억나지. 잊을 수가 없지. 그날 이후로 난… 평생 형사가 아니었어. 그냥… 귀신한테 끌려다니는 노인일 뿐이었다네.”
전화를 끊자마자 두칠은 검정색 스크랩북에서 오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철길 앞에 웃고 있는 아이들 사이, 카메라를 어색하게 피하는 해용의 모습.
그리고 사진 구석에 흐릿하게 찍힌 뒷모습 하나. 그는 그 뒷모습을 확대해 보며 중얼거렸다.
“넌... 지금도 그 옆에 있구나. 24년이 지났는데도...”
권두칠은 바람막이를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꼭 끝을 보자꾸나, 해용아.”
권두칠은 바람막이 속 주머니에 수첩을 찔러 넣고, 구두끈을 바짝 조여 맸다.
“이제야 네가 나타나는구나… 기다렸다, 해용아.”
그는 오래된 골목을 지나 광흥동 철길로 향했다. 도시의 불빛은 번화했지만, 철길 아래 그 골목만은 시간이 멈춘 듯 낡고 음산했다. 부서진 담벼락, 벗겨진 벽보, 그리고… 아직도 낙서처럼 남아 있는 그 문양.
해용이가 그리던 ‘숨겨진 문’이었다.
“여전히 있군… 아무도 지우지 않았다는 건, 누군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뜻이지.”
그는 낙서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 순간, 바람이 멈췄다. 귀에서 윙— 하는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찾아줘…”
누군가 속삭였다. 분명히, 바로 옆에서. 그러자 문양이 그려진 벽돌이 ‘딸깍’ 하고 눌렸다.
두칠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벽에 귀를 댔다. 텅텅, 통!
“속이… 비어 있어?”
그는 주변에서 녹슨 금속파이프를 주워 들고 벽돌 사이를 파기 시작했다. 반쯤 허물어진 벽 사이로 드러난 건… 낡은 지하실 문. 녹슨 철문에는 누군가 손톱으로 긁은 듯한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7월 3일, 여기서 나갔다.”
갑자기 발 밑에서 ‘딱—’ 하는 소리가 났다. 두칠이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을 때, 발 디뎠던 자리가 무너지며 구멍이 뚫렸다.
쾅!
먼지가 일며 구멍 안쪽에서 작은 상자가 튀어나왔다. 상자 안엔 오래된 폴라로이드 사진이 수십 장 들어 있었다. 그 중 하나 해용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의 눈 뒤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겹쳐 서 있었다.
“이건… 그때 나도 못 봤던 놈인데…”
사진의 뒷면엔 단 하나의 글씨만.
“‘그 아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노란 불빛 하나가 깜빡였다. 누군가 지하실 안쪽에서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검은 실루엣, 익숙한 어깨선.
“두칠이 형… 형도 끝나지 않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