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광해는 성군이었다?

나도 대통령이 되고 싶다

광해군의 폐위 이유 중 폐모살제는 사실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이들이 왜곡한 건 아닐까?

사실 많은 역사학자들이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프레임이 인조반정 세력의 정치적 구실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한다.

‘폐모’ 라 불리는 사건은 인목대비(선조의 계비)를 ‘폐서인’, 즉 왕족 신분에서 일반인으로 강등시킨 조치이다. 하지만 완전히 폐위하거나, 죽이지 않았다. 인목대비는 생존했고, 별궁에 유폐되었지만 기본적인 대우는 유지되었다고 전한다.

실제로 정권을 잡은 인조도 인목대비를 바로 복위시키지 않고 4년간 그대로 두었다. 이상하지 않나

또 한편 ‘삭제’는 영창대군의 죽음을 말하는데, 직접적인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 영창대군은 정권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진 ‘정인홍·이이첨 등 대북파’가 앞장서서 죽음으로 몰아갔다. 광해군이 이를 막지 못한 ‘정치적 무책임’은 있을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명령했다는 기록은 명확지 않다.


인조반정 세력은 광해군을 쫓아내며 정통성과 명분이 절실했기 때문에, "광해는 유교윤리를 무너뜨리고 패륜을 저지른 폭군이다!"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다. 실제로 반정 이후 작성된 역사 기록들(광해군일기는 실록이 아니라 사초 수준)에는 ‘폭군’으로 꾸며진 장면들이 많이 삽입되었다.

그러면 왜 광해군은 적극 반박하지 않았을까?

광해는 정치적 내전을 막고,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려는 선택이었다는 해석이 많다. 왕은 유배 이후 "내가 죽어도 나라만 편안하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또한 그는 폐모와 관련된 직접적 해명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이것이 오히려 “진짜 범인이라면 그렇게 조용히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을 낳기도 한다.


광해는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용당한 '이성적인 현실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무자비하지도, 무능하지도 않았지만, 당대의 도덕 잣대와 ‘정통’이라는 이름 앞에 버려진 왕.

오늘날 우리는 묻는다.
"정말 폐모살제는 광해군의 죄였을까?
아니면, 권력을 잡기 위한 역사 속의 각본이었을까?"

인조가 나라를 벼랑으로 몰아가고 자신은 강화도며 남한산성으로 도주하고 있을 때, 광해는 무어라 생각했을까?

혹여,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암군 인조에게 나라를 넘긴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통곡했을 것이다.

오늘날, 사료를 다시 정리하여야 한다고 여겨진다. 역사는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다.

성군이어도 잘못된 점을 간과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우리 역사적 사료를 언급해 보더라도 광해는 복위시켜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어리석은 암군 인조를 능양군으로 강등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광해가 인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광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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