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연애시라고 하는 한국 현대시를 보면서, 한국 현대시의 몰이해는 이상 오감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다. 이것은 동시에 한국어의 발전이 193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어는 느닷없는 유체이탈화법이 활개를 친다. 정치, 사회, 문화, 대부분의 한국 사회 기득권 지배세력들의 말은 어쩌면 한국어가 아닌지도 모른다. 무늬만 한국어다.
말에는 그 민족의 사상과 철학과 역사와 미래가 담겨있다. 무서운 것은 말은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한국어는 무늬만 대물림되고 있다.
적어도 우리 민족이 사용하는 한국어만은 진정한 한국어여야 하지 않겠나!그러나 무엇이 되었거나, 이 모든 것은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몰이해로 귀결된다. 공감능력 0의 세상이다. 이게 뭔가?
모두 한국 문학 기득권의 오독 탓이라면 너무 황당한 이야기인가? 나는 확신한다. 한국어 몰이해는 한국 현대시 오독에서 출발했다.
한국 현대시 오독이 한국어의 발전을 무려 100년 동안이나 막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내린다.”
이것을 논리 모순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백석이 논리 모순의 시를 썼다고 하는 오독을 당당하게 학생들에게 세뇌시키고 있다. 그것뿐인가!
내가 왜 가난한지, 왜 나타샤가 아름다운지, 왜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푹푹 내린다고 하는지....
푹푹 내리는 눈이 있는가? 시적자유? 시적자유라는 말은 사기다.
백석의 시를 논리 모순과 시적자유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백석의 시 수준에 도달해 있는 읽기가 과연 있는가?
화자인 나를 백석이라고 하고 나타샤가 백석이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하고 흰 당나귀가 두 사람의 사랑을 연결하는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해석으로는 앞으로 1000년이 가도 한국어의 몰이해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