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4월 17일은 이상이 1937년 동경에 있는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만 26년 7개월의 생을 마감한 날이다.
이상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아마도 보성고 동문이었던 시인 김기림 그리고 아내 변동림(김향안)이었을 것이다. 물론 남달라 보이는 이상과 김유정과의 관계도 있지만, 김기림은 같은 시인이라는 점에서 또한 변동림은 아내였다는 것에서 그러하다. 때문에 김기림과 변동림이 기억하고 증언하는 이상에 대한 진술이 이상의 본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역시 이상의 작품을 해석하지는 못했다. 그저 작품에 대한 이상의 자세와 생각을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이상 또한 이 두 사람이 아무리 자신과 가까운 사이였다고는 하지만 작품을 설명해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감도」와 「날개」등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두 사람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하나 김기림과 변동림이 오감도와 날개의 내용과 주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공론화할 수 없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불행하게도 이상의 오감도와 날개를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 음모와 후방 단속에 미쳐 날뛰던 일본 경찰에 그만 붙잡혀, 몇 달을 간다(神田)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 있었다. 중략.... 그 육체가 드디어 수습할 수 없이 도어서야, 경찰은 그를 그의 옛 하숙에 문자 그대로 팽개쳤던 것이다. 무명처럼 엷고 희어진 얼굴에 지저분한 검은 수염과 머리털, 뼈만 남은 몸뚱어리, 가쁜 숨결― 그런 속에서도 온갖 지상의 지혜와 총명을 두 낱 초점에 모은 듯한 그 무적(無敵)한 눈만이, 사람에게는 물론 악마나 신에게조차 속을 리 없다는 듯이, 금강석처럼 차게 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과 조국과 시대와 그리고 인류의 거룩한 순교자의 모습이었다.“ 라고 김기림은 1949년 발간된『이상 선집』에 쓰고 있다.
또한 김기림은 이상이 “오늘의 환경과 종족과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음을 선언하고, 이상이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이 없”고 이상의 “시에는 피가 임리(淋漓)”한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는 현대라는 커-다란 파선에서 떨어져 표랑하던 너무나 처참한 선체조각이었다”라고 했다. 여기서 김기림이 명명한 ‘시대의 혈서’는 이상의 작품들이다.
김기림은 이상의 삶과 문학에 대해 “차마 타협할 수가 없는 더러운 세계와 현실의 등 뒤에 돌아서서 킥킥 웃어주었으며 때로는 놀려주면서 달아나는 것이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기림은 이상 사망 3개월 후인 1937년 6월 조광지에 발표한 「고 이상의 추억」에서 이상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마지막으로 일본 동경 이상 하숙집에서의 만남을 회상하면서 이상은 “그의 작품에 대한 월평에 이르자 몹시 흥분해서 속견을 꾸짖는다. 중략... 날개의 평은 대체로 승인하나 작자로서 다소 이의가 있다고 했다.” 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날개”에 대한 평을 대체로 승인하나 작자로서 다소 이의가 있다고 한 것은, 이상이 월평을 수긍한 것이 아니라 체념한 것이었음을 김기림은 알아채지 못한 듯하다. 그나마 「오감도」보다는 자신의 의도를 알아준다는 정도의 의사표시였을 것이다.
김기림이 결정적으로 이상의 작품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사건은 앞서 밝힌 해방 후인 1949년 발간한 『이상 전집』에서 필명 “이상”이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공사장의 한 인부가 실수로 그를 ‘이상(イさん)’ 하고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필명 “이상”은 이상식 한자 조합단어다. 김기림은 불행하게도 가장 가까이에서 이상의 시를 목격하고 혈관을 짜서 쓴 시대의 혈서라고 했지만, 이상의 시를 전혀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 사람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 (김향안)은 이상이 “으레 검문 당하면서도 한복을 즐겨 입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동소문(東小門) 밖에서 시내에 들어오려면 우리들은 혜화동 파출소를 지나야 했고 반드시 검문(檢問)에 걸렸다. 특히 한복 차림의 이상은 수상한 인물의 인상을 주었지만 보호색(保護色)으로 바꾸려하지 않고 하루 한번씩 일경(日警)과의 언쟁(言爭)을 각오하면서도 어머니가 거두어주시는 한복을 편하다고 즐겼다. 이상의 불행(不幸)은 식민지 치하라는 치명적인 모욕감을 당했을 때 치미는 분노(憤怒)와 저항의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변동림(김향안)은 이상이 일문으로 시를 쓴 시인이 된 것에 대하여 마음 아파한다. 더욱이 이상의 시에 대해서 항일시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발한다. 딱하다. 이상이 일본어로 시를 쓴 것은 제국주의 일본을 시험한 것이고 또 일본어로 쓴 시 중에 변역 퇴고해서 오감도에 포함시킨 시제4호와 시제5호의 내용만 보더라도 이상이 쓴 일본어 시 역시 격렬한 항일 저항시였다는 것을 짐작도 못한 것이다. 이것은 이상의 불행이고 한국 현대문학의 비극이다. 물론 항일시라고 주장했던 학자들 역시 이상의 시를 해석하지 못한 채 추측에 불과한 무의미한 주장을 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상이 살았던 세계와 김기림과 변동림(김향안) 그리고 한국 현대문학이 살았던 세계의 차원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천재 민족시인 이상 앞에 다시 무릎 꿇고 머리 숙인다.
천재 민족시인 이상이여 영원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