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유섭 Jun 10. 2022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자아 비판서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1948년 10월 『학풍』 창간호에 발표된 32행, 다섯 개 문장으로 이루어진 연 구분이 없는 시다. 이 시를 가리켜 기존의 평가는 ‘높은 격조를 이룬 페시미즘의 절창(유종호)’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의 하나(김현)’ 등 격찬 일색이다. 

  이러한 기존 해석에 격렬하게 동의하지 않는다. 이 시에서도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보여주었던 패배한 자의 살아남으려는 세계관을 다시 보여준다. 그러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는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배를 직시하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도피하려는 자의 허약한 모습이었다면 이 시에서는 다른 모습이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제목은 화자가 거주하고 있는 듯한 곳의 주소이다. 시가 편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제목은 발신지이고 화자가 발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시 안에 편지 수신지와 수신자 역시 들어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독백의 시라면 이 시는 수신자를 향한 시인 것이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1행에서 4행-  

   

  첫 번째 문장이다. 1행에서 4행까지. 내용은 아내도 있었고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있었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도 있었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삶의 형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화자가 가지고 있던 이 일반적인 삶의 형태가 없어지고 멀어졌다. 주목해야 할 것은 “어느 사이에”이다. 일반적인 삶의 형태가 저절로 없어지고 멀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어느 사이”에 무슨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없어지고 멀어져 거리 끝으로 몰려나 버린 상황이다. 여기서 “쓸쓸함”은 삶이 몰락하고 거리 끝으로 몰려난 자의 쓸쓸함이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5행에서 8행- 

    

  두 번째 문장이다. 5행에서 8행까지. 일반적인 삶의 형태가 없어지고 멀어져 몰락하고 나서 “바로 날이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라며 자신의 처지가 생존의 어려움에 빠져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바로”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앞서 “어느 사이에”가 사건이었음을 확인해 준다. “바로”를 사전적 의미 중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아주 가까이”의 의미로 쓴 것이다. 어느 사건으로 인해서 일반적인 삶의 형태가 없어지고 또 멀어지고 나서 ‘아주 가까이’ 즉 곧바로이다. 거처마저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세를 들었다. 이는 화자가 어느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해 더해 오는 추위로 생존의 어려움 속에서 초라한 방에 세를 들어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9행에서 15행-     


  세 번째 문장이다. 9행에서 15행까지. 화자가 거듭 몰락한 자신의 어려운 삶을 나열한다. 이러한 나열은 백석 시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 시에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1행부터 15행까지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과 나열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하게 편지 수신자를 향한 것이다. 그래서 그 진정성까지 의심된다. 형식면에서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백석의 뛰어난 시 중에 하나인 1941년 《문장》에 발표한 「흰 바람벽이 있어」와는 전혀 다른 정서를 보여준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낮이나 밤이나”는 단 한 순간도 다른 생각하지 않고라는 의미이다. 이는 반성과 후회의 자세이다. 나는 나 혼자도 추스르기 힘든 존재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을 9행에서 15행까지 ‘쉼표’와 나열의 연결형 어미 “며”를 사용해서 백석이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백석이 종결형 어미 “다”로 끝나는 전체 5개의 문장 속에 왜 많은 쉼표를 찍었는지 알 수 있다. 하나하나의 상황을 연결해 나열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지를 절실하게 강조하려는 의도이다. 즉 자신의 절실함을 강조하기 위해 ‘쉼표’를 반복해서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9행에서 15행까지 쉼표와 “며”로 연결하고 나열해서 강조한 문장들은 15행의 결론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연하여 쌔김질을 한다는 것은 내 어리석음이 내 슬픔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소처럼 연해서 쌔김질 즉 되짚어 끝없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반성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화자가 말하는 어리석음이 무엇일까? 앞서 나열한 문장 속에 들어있다. 후회와 반성은 생각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 시는 편지다. 그래서 편지 수신자를 향해 화자는 자신이 얼마나 절실하게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는지를 생각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드러내어 보여주려고 한다. 그것을 드러내는 대표되는 문장이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와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이다.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자신을 스스로 외부와 단절시키고 자리에 누워 끝없는 후회와 반성을 하고 있다며 그것을 알아달라고 구구절절 나열하면서 편지 수신자에게 쉼표로 절실하게 강조한다. 이는 앞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와 연결된다. 나는 나 혼자도 추스르기 힘든 존재이고 나 이외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때문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스스로 나를 외부와 단절시키고 계속 반성하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화자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어느 사건이 일어났고 그래서 일반적인 삶의 형태가 무너지고 거리 끝으로 내몰려 목수네 방에 세를 들어 살게 되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즉 내 슬픔의 이유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던 어리석음 때문이고 그래서 어느 사이에 사건이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16행에서 19행-

    

  네 번째 문장이다. 16행에서 19행까지. 화자의 어리석음이 죽을 수밖에 없는 큰 죄라는 것을 느끼는 한탄이다. 가슴이 꽉 메어오고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이고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럽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하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었다고 편지 수신자를 향해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20행에서 32행-

     

  다섯 번째 문장이다. 20행에서 32행까지다.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상반될 때 쓰는 접속 부사 “그러나”를 사용해서 화자는 죽음과 반대인 삶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반성문 형식은 보편적으로 후회와 반성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서,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용서를 빌면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결심과 다짐을 보여주는 논리구조로 전개된다. 

  이 다섯 번째 문장 또한 20행부터 31행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용서를 빌면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구체적인 결심과 다짐의 생각들을 쉼표와 연결형 어미 “며”를 사용해서 결론인 32행을 향해 나열한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20행과 21행에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런데 화자가 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때”는 화자가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때를 의미한다. 때문에 살기 위한 조건을 암시하는 단어이다.

  “내 뜻이며 힘으로”는 내가 판단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방향과 힘을 의미한다. 주목해야 할 단어는 힘이다.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는 내가 판단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방향으로 사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힘보다 더 크고 높은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는 “내 뜻이며 힘” 즉 내가 판단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방향과 그것을 이루어내려는 힘보다 더 크고, 높은 뜻과 힘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더 크고, 높은 뜻과 힘에 화자가 복종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를 살펴야 한다. 하나는 “더 크고, 높은 것”을 운명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타당성이 없다. “이것들보다”라는 진술은 “이것들”이 “내 뜻이며 힘”이고 이는 앞서 후회와 반성을 하면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내 어리석음이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던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더 크고, 높은 것”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던 죽을 수밖에 없는 내 어리석음보다 더 크고, 높은 뜻이고 힘이다. 이는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힘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힘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면서 살아가려는 미래의 삶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내 어리석음보다 더 크고 높은 뜻이고 힘이라는 것을 백석이 깨달았다고 편지 수신자에게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개인인 화자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뜻이며 힘은 국가권력 외에 없다. 따라서 국가권력이 백석을 혼자 살아가라고 하고 백석은 그것을 크고 높은 뜻이며 힘이라고 하면서 복종하고 순응하겠다고 한다. 

  이를 운명이라고 해석하면, 운명에게 내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반성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면서 그보다 더 큰 뜻이며 힘인 운명이 굴려 가는 삶을 살겠다고 편지를 보내는 것이 된다. 더구나 뒤에 28행에서 무릎을 꿇는 등의 살려달라고 용서를 빌면서 자신이 갈매나무처럼 혼자 살겠다고 운명에게 다짐한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논리이다.


  또 하나를 살펴야 한다. 이 시가 일제강점기에 쓴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것 역시 설득력이 없다. 백석은 이상처럼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배에 격렬하게 저항하지는 못했지만, 친일을 한 것은 아니다. 식민지배를 직시하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도피하려는 세계관을 보였을 뿐이다. 도피 역시 넓게 보면 백석식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가 일제강점기에 쓴 것이라면 앞서 살폈듯이 제국주의 일본 국가권력에 굴복하겠다는 것이 된다. 이는 백석이 살아온 행적과 남겨진 시편들을 볼 때 전혀 수긍할 수 없는 해석이다.     

  그러면 이 시는 언제 쓴 것이고 국가권력이란 무엇일까? 필자는 해방 이후인 1946년 1월, 백석이 러시아어 통역 비서가 되어 모셨던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이 소련과 김일성 일당에게 체포되어 연금된 이후부터 이 시가 발표된 1948년 사이에 쓴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은 북한 국가권력을 의미한다. 백석이 북한 국가권력에 복종하겠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시의 수신지는 북한 국가권력이고 수신자는 백석을 살려 줄 수 있는 어느 수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시는 백석이 북한 국가권력 어느 수괴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화자가 자신의 어리석은 삶을 반성하고 북한 국가권력에 복종하고 순응해서 살겠다고 생각한 뒤에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는 화자가 자신의 뜻과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북한 국가권력의 뜻과 힘에 복종하고 순응해서 살 것을 결심하고 마음이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어지러운 마음”이라는 진술로 화자는 ‘어느 사건’으로 어지러워졌던 마음의 갈피를 잡았다는 것을 강조해서 드러낸다. 

  그러나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이라고 진술을 하는 이유는 북한 국가권력이 화자를 불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때즘 해서는”은 북한 국가권력이 자신을 불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때쯤이다.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나줏손은 평안도 방언으로 저녁때다. 싸락눈은 북한 국가권력이 화자를 불신하는 차가움을 상징한다. 따라서 저녁때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다는 것은 화자를 향해 다가오는 북한 국가권력의 죽음과 다르지 않은 불신과 감시와 위협을 의미한다. 그것을 느끼는 저녁이면 화자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화로를 더욱 다가 낀다. 

     

  “무릎을 꿇어보며,”  

   

  다시 강조하지만, 이 시는 편지다. 화자는 살기 위해 화로를 더욱 다가 끼고 무릎을 꿇어본다고 한다. 이는 ‘살고 싶습니다. 살려주세요.’라고 편지 수신자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행위이다. 

  여기까지가 후회와 반성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서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며 자신을 믿어달라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편지 수신자에게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굳은 결심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다짐하는 것만 남았다.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화자가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편지 수신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백석식 독야청청이다. 이것이 화자가 살 수 있는 조건이라고 백석이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굳은 절개를 말할 때 우리 선조들은 흔히 소나무의 푸르름 등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백석이 굳이 잘 알려지지 않은 갈매나무를 시에 등장시킨 이유가 뭘까? 

  갈매나무는 골짜기와 냇가에서 자란다. 높이는 5m 정도이며, 가지 끝이 변하여 된 가시가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작은 가지 끝이 변하여 가시가 된다는 점이다. 이 가시는 스치기만 해도 피가 뚝뚝 흐를 정도로 날카롭다. 오히려 가시나무보다 더 치명적이어서 사람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나무이기도 하다. 특히 갈매나무는 드문 나무다. 습기를 좋아하는 탓에 서식지가 냇가나 골짜기 등이고 대규모로 숲을 이루거나 군락을 이루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이것이 백석이 자신을 믿어달라며 갈매나무로 자신의 굳고 정함을 드러내는 이유이다. 

     

  앞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와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와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의 의미가 나 혼자도 추스르기 어려운 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나 이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고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스스로 외부와 단절시키고 계속 반성하고 있다는 것과 연결된다. 그래서 새로운 삶은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즉 북한 정치 권력의 차가운 불신과 감시와 위협을 달게 받아들이고 감내하면서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가시 돋은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되어 혼자 살겠다는 충심을 보여주는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이것이 내 뜻이며 힘보다 더 크고 높은 뜻이며 힘인, 북한 국가권력이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에 복종하는 삶인 것이다. 화자는 그 삶에 순응해서 살겠다고 용서를 빌면서 수신인인 북한 국가권력 어느 수괴에게 편지로 다짐하며 호소하고 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백석이 해방 이후 북한을 점령한 북한 공산주의 국가권력 어느 수괴에게 죽을죄를 지었다며 살려달라고 하는 편지 형식의 자아 비판서이다. 동시에 세상을 향한 선언이기도 하다.(이글은 다음 브런치, 페북, 블로그에 동시에 올립니다.) 


         

  *백석: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0월에 조만식을 따라 소설가 최명익, 극작가 오영진 등과 ‘김일성 장군 환영회’에 참석해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되었으나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가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허준이 백석이 해방 전에 쓴 시 「적막강산」,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등을 보관하고 있다가 1947년 말부터 1948년 가을에 걸쳐 서울의 잡지에 실었다. 1948년 『학풍』 창간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발표하였다. 남쪽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석 [白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석은 8.15 광복 후 스승 조만식의 부름을 받고, 평양에 머무르면서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으로 조만식을 도왔다. 중략.... 6.25 전쟁 전후로 후배 고정훈이 백석에게 2차례 월남을 제의했다. 하지만 백석은 모두 거절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고당 조만식 선생을 모셔야 한다. 2. 처 그리고 큰아들 화제만 데리고 혹은 혼자만 못 간다. 다른 가족과 친지가 너무 많아 월남하면 남은 가족 친지가 고초를 겪을 것이다. 3. 가족 친지 모두 터전이 북에 있는 서민이다. 모두 같이 간다 해도 남에서 생활 터전이 없어 더 힘들지도 모른다. 4. 이젠 감시가 심해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중략..... 월남하는 고정훈에게 "나는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후 고당의 비서를 그만두고 칩거하며 집에서 엄청난 양의 러시아 및 각국의 소설과 시를 번역했다고 한다. 1년에 10권씩 번역했다고 한다.

  이후 전후 번역과 아동문학(특히 동시)에 천착하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1958년 김일성 정권의 문예정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자아비판을 강요당한 뒤 양강도로 추방됐다. 중략.... "사상과 함께 문학적 요소도 중요시하자"는 주장을 했다가 숙청당해 추방된다. 1959년 6월 '부르주아적 잔재'로 비판받고 외지고 험한 지방인 양강도 삼수군의 협동농장 축산반(양치기)으로 쫓겨났으며, 1962년 이후로는 아예 북한 문단에서 사라졌다. -네이버 나무위키-  

   

  *조만식: 광복 직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중략....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중략.... 6·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金三龍)·이주하(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중략....

[네이버 지식백과] 조만식 [曺晩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