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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섭 Aug 28. 2022

나의 영화 이야기1 -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

  박찬욱은 인간에 주목하는 감독이다. 봉준호와는 반대편에 서 있다. 박찬욱은 헤어질 결심에 두 명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박찬욱 영화의 특징 중에 하나인 비정상적인 주인공 두 명이다. 이 비정상적인 두 명이 그것도 젊은 여자와 남자로 만났을 때 어떤 해프닝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나는 본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남녀 사이에 사랑이라는 양념을 뿌리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박찬욱은 사랑을 뿌린다. 

  중국에서 살인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여자 사형수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너무 뛰어난 미모에 네티즌들이 열광하면서 sns 등에 그 여자 사형수를 사형시키지 말라는 글 등을 올렸다는 뉴스를 본 적 있다. 이것이 내가 “헤어질 결심”을 보는 출발점이다. 

    

  서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이다. 자기 어머니와 철성의 어머니를 죽인다. 이 두 번의 살인은 안락사라는 치장을 달았지만, 서래가 자기 어머니를 그리고 다른 사람의 어머니를 마음대로 안락사시키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서래의 안락사 살인은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의 고통을 멈춰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보는 자신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동시에 서래가 남편을 죽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탕웨이의 미모는 서래의 안락사를 가장한 살인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박찬욱이 탕웨이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이유이다. 세 번의 살인에서 서래가 보여주는 것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대상은 죽여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엽기적이고도 극단적인 이기주의이다. 이 엽기적이고도 극단적인 이기주의는 또 다른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인 박해일과 사랑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박해일 역시 정상적인 삶을 사는 형사가 아니다. 마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형사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그냥 자신이 풀어야 하는 문제(사건)에 과잉으로 빠져 헤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일 뿐이다. 그래서 서래가 남편을 죽인 살인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풀어준다. 즉 형사인 박해일이 범죄를 저지른다. 사회 정의를 위해 투철한 경찰 정신으로 범죄자를 처벌하는 형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냥 자신 앞에 놓인 문제 해결에 미친 극단적인 이기주의 환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것 역시 박해일이 열정적인 형사이고 서래를 풀어주는 행위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박해일의 순수해 보이는 미모 때문이다. 캐스팅에 박수를 보낸다.

      

  서래와 박해일은 사랑을 왜곡한다. 폴 버호벤 감독의 “원초적 본능”에서 사론 스톤과 마이클 더글러스가 보여주었던 육체적 사랑보다 처참하다. 박찬욱이 보여주는 두 명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의 정신적 사랑 즉 “플라토닉 러브”는 자신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는 서래가 박해일과의 사랑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고 묻혔던 전남편 살인 사건을 원점으로 돌리는 짓을 태연하게 할 수 있게 한다. 또 다른 방식의 미저리다. 그런 서래의 곁을 수사라는 명목으로 맴돌면서 박해일 역시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점점 서래와의 사랑을 자신이 풀어야 할 문제로 인식하고 빠져들지만,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이 마지막 장면으로 드러난다. 박해일도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살아있는 자신이 사랑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한 서래가 사랑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행동을 실행하면서 끝난다. 

  “헤어질 결심”은 사랑의 영화가 아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의 황폐하고도 처참한 삶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이런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에게 세상은 그들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본다.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해도 그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사랑 역시 왜곡된 것이다. 사랑은 이기주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닐까? 

  엔딩곡인 정훈희와 송창식이 부르는 안개는 박찬욱이 의도한 수준 높은 불협화음이다. 두 목소리는 같은 곡을 부르고 있지만, 전혀 다르게 들린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의 따로 노는 이중창이다.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글을 쓰는 기분이 좋지 않다. 이 글 역시 내 극단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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