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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섭 Sep 16. 2022

한용운 알 수 없어요 해석

유교적 국가관과 세계관의 혼란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모두 6행으로 이루어진 시다. 내용을 살펴보면 1행과 6행을 하나씩 연으로 갈라서 읽어야 한다. 의미 구조가 1행, 2~5행, 6행의 3개 연으로 이루어진 시다. 

  제목 “알 수 없어요”는 시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화자가 어떤 것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오동잎이 떨어지는 경우는 새가 오동나무에 앉았을 때이다. 오동나무는 전설의 새인 봉황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다. 봉황과 오동나무는 옛 그림에 함께 그려지고는 했다. 

  조선에서 봉황은 왕을 상징한다. 따라서 오동잎이 떨어지는 발자취는 조선 왕의 발자취이다. 그런데 화자는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라고 묻고 있다. 오동잎이 떨어지는 발자취가 조선 왕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는 조선에 왕이 없다는 말이다. 조선의 주권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2행에서 5행까지 얼굴, 입김, 노래, 시를 차례로 제시하면서 조선 임금의 소유이어야 하는 것들을 시적으로 애틋하게 치장해서 나열한다. 

  한용운이 하려는 말은 조선 팔도에 나뭇잎 하나, 구르는 돌멩이 하나, 기어 다니는 벌레 한 마리까지 조선 왕의 소유라는 강조이다. 그런데 이 조선의 모든 것이 소유주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왕과 주권을 잃어버린 화자와 조선 민족의 망연자실함을 의미한다. 동시에 조선을 소유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지만 그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반복해서 사용하는 의문형 종결 어미 “까”는 망연자실함과 한탄을 드러내는 조용한 눈물의 장치이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불교적 윤회의 논리이기도 하지만,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되고 기름은 다시 타서 재가 된다는 논리는 조선 왕과 주권을 향한 화자의 영원불변한 충효와 불사이군의 유교적 세계관을 의미한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라는 진술은 왕과 주권을 잃어버린 신하이고 백성인 한용운이 겪고 있는 유교적 세계관의 혼란을 한탄하는 고백이다. 

  시인이고 승려이고 독립운동가이고, 충효와 불사이군의 유학자이며 개혁가이기도 했던 한용운의 왕과 주권을 잃은 망연자실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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