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연애시가 아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연애시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나 실존 인물인 기생 진향(김영한)과의 사랑 이야기라고 하기도 한다.
백석이 술을 마시면서 환상 속에서 진향과 세상의 관심을 피해서 산골로 들어가서 둘이 살자고 하는 내용이라는 해석이 주류를 이룬다. 또 하나는 상상으로 이상적 순수의 사랑을 꿈꾸는 시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제는 아무리 가난해도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삶을 가치롭게 한다. 시대의 가난한 사랑의 명시라고 하면서 연애시의 백미라고 한다.
이것이 지난 세월 한국 현대시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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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연애시로 해석할 경우 여기저기서 해석이 막힌다. 즉 오독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연애시가 아니다.
백석은 수준 높은 시를 쓴 시인이다. 시에 사용한 단어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배치되어 번쩍이는 의미와 이유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백석의 시, 특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시적 자유’ '낯설게 하기'라는 등의 해석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애시가 아니라면, 어떤 내용의 시일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시 전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상상의 시고 한탄의 시다. 이미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기존 해석은 인용하지 않고 필자의 해석만 이어가려고 한다.
왜 제목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인가?
흰 당나귀는 존재하지 않는 동물이다. 이것은 이 시가 상상이나 환상에 바탕을 둔 시라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접속 조사 “와”를 사용해서 이 세 가지가 동일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동일체다. 나는 나타샤고 나타샤는 흰 당나귀인 것이다. 하나로 묶인 운명공체라는 것을 접속 조사 “와”로 강조하고 있다. 왜일까?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1연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내린다고 하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때문에 이 시는 남녀 사이 사랑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제목에서 보았듯이 나는 나타샤와 동일체다.
내가 나타샤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다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특히 “푹푹”은 온몸이 늪에 빠지듯 눈에 빠진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눈은 형벌이다. 따라서 가난한 내가 나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형벌의 눈이 내린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푹푹”이다.
이것을 연애시로 읽어서 ‘언어관습의 낯설게 하기’라고 설명하는 기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3가지 의문이 생긴다. 시의 화자인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왜 가난한가? 또 하나, 나타샤는 왜 아름다운가? 이다.
우선 내가 나를 사랑해서 형벌의 눈이 내리는 존재는 당시 왜정 식민지 지배를 당하는 조선 민족일 수밖에 없다. 조선 민족이 조선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민족애일 것이다. 그리고 조선 민족이 민족애를 가지는 것은 제국주의 일본에게 형벌을 받는 것이 자명하다. 그래서 시의 화자인 나는 식민지 노예인 조선 민족이고 때문에 가난하다.
나타샤는 무엇이고 왜 아름다운가? 나타샤는 상상의 존재다. 시인이 상상하는 러시아 백인 여인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조선 민족인 나와 왜 동일체인가? 조선 민족은 백의민족이다. 그런데 나라를 잃었다. 그래서 나라를 잃은 조선 민족을 갑돌이 갑순이가 아닌 나타샤라는 상직적인 러시아 백인 여성의 이름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나라를 잃었지만 조선 민족에게 조선 민족은 아름다운 것이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2연, 부분-
흰 당나귀는 존재하지 않는 동물이다. 그런데 왜 흰 당나귀라고 했을까? 이육사의 시 “광야”에 나오는 그 백마다. 그러나 역시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흰 당나귀다. 이것은 이상이나, 이육사와는 다른 백석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백석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도피를 선택한다. 즉 눈이 푹푹 내리는 형벌의 밤을 피해 희망을 태우고 와야 할, 흰 당나귀를 타고서 산골로 가자고 한다. 더구나 깊은 산골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이것은 자조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출출이”와 “마가리”가 등장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산골에는 많은 새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백석이 상상하는 산골에 사는 새는 출출이 즉 뱁새,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는 그 뱁새다.
왜 그 많은 새 중에 뱁새인가?
“마가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마가리”는 평북, 함남, 사투리로 오막살이다. 다른 하나는 부잣집에 딸린 노비들이 사는 오두막이다. 부잣집에 딸린 노비들이 사는 상상의 오두막이 있는 깊은 산골에는 뱁새가 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백석이 상상하는 산골짜기 마가리는 사랑의 도피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곳이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출출이”이와 “마가리”로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나라를 잃은 식민지 노예인 조선 민족이 민족애를 가지고 살려면 뱁새가 우는 깊은 산골짜기 노비들이 사는 오두막에서나 살아야 한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3연, 부분 -
백석의 가치관은 무엇인가?
왜정 식민지 지배 속에 조선 민족이 그나마 민족애를 가지고 살려면 노비 신세로 깊은 산골 노비들이 사는 오두막에서나 살아야 한다. 그것을 세상, 즉 왜정 식민지 지배에 지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상은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백석이 아니다.
때문에 술의 힘을 빌려서 술주정하듯 한탄과 자조의 마음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시의 화자가 술을 마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왜정 식민지 지배 시대 백석의 현실 인식인 것이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뎌낼 수 없는 괴로움과 통한을 드러내고 있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3연 -
눈은 푹푹 내린다. 조선 민족인 내가 조선 민족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벌의 눈이 내리는 오늘 밤, 그나마 폭압의 왜정 식민지 지배에도 꿋꿋하게 조선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애를 간직한 나의 모습을 보고 비록 백마는 아닐지라도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흰 당나귀도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통한의 절규이다.
나라를 잃고 왜정 식민지 노비가 되어 깊은 산골에 숨어 가랑이 찢어진 맵새 소리나 들으며 오두막에 살아야하는 신세의 조선 민족이다. 이러한 울분을 참을 수 없어서 시의 화자는 술을 마시고 있다. 그래서 조선 민족의 희망을 태우고 나타나야 할 흰 당나귀가 우는 것을 “응앙응앙”이라고 한 것이다.
“응앙응앙”을 기존 연애시로 읽는 해석은 역시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낯설게 하기’라고 한다. 또는 기쁨을 표현하는 밝고 가벼운 느낌을 주기 위한 ‘의성어’라고 한다.
시의 화자인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나타샤와 뱁새 우는 산골짜기 마가리에 살게 된 것이 과연 흰 당나귀가 좋아하고 축복할 일인가? 좋은데 왜 우는가? 우는 것이 축복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는다.
백의민족인 조선 민족의 희망을 태우고 와야 할, 흰 당나귀가 우는 것을 “응앙응앙”이라고 한 것은 자조이고 절규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간단하게 ‘ㅇ’빼봐라, ‘으아으아’ 울었다고 하는 것이다. 절규다! 그런데 기뻐서 운다는 문맥에 맞추기 위해서 으아으아에 ㅇ을 붙인것이다. 연막이다.
그나마 조선 민족이 민족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쁘지만 이러한 너무나도 작은 것에 불과한 민족애에도 기뻐해야 하는 절망적인 현실에 한이 맺히는 기쁨인 것이다. 왜정 식민지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조선 민족의 처참한 현실을 통한의 자조와 절규로 울부짖는 울음어서 "응앙응앙"인 것이다.
이것이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참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