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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섭 Sep 02. 2021

김소월 "진달래꽃" 100년 동안의 오독

 김유섭

     

  김소월의 대표작인 “진달래꽃”은 사랑의 이별시로 해석되어왔다. 한국 현대시가 도달한 최고의 이별미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의 슬픔을 체념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산화공덕과 애이불비를 나타냄으로써 자기희생과 정성, 순종, 등 유교적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고 한다. 또는 소박맞은 여인의 한 맺힌 이별시라고도 한다. 또 하나 이어령(李御寧)은, 이별의 가정을 통해 현재의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지난 100년 동안 이어져 온 기존 해석은 사랑시 이거나, 사랑의 이별시라는 것이다. 더구나 황조가, 가시리, 서경별곡, 아리랑까지 우리 전통 이별시와 연결되어 이어지는 이별의 정한을 보여주는 시라는 등, 참담한 오독으로 김소월의 참모습을 삭제했다.

     

  먼저 황조가, 가시리, 서경별곡, 아리랑을 살펴보자. 모든 시에 이별하는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진술이 명확하게 나온다. 

  황조가에 “암수가 다정히 즐기는데”, 가시리에서는 “나는 엇디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서경별곡에서는 “괴시란듸 즉 사랑해 주신다면” 그리고 아리랑에서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 등이다. 모든 시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진술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그 어디에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드러내는 명확한 진술이 없다. 


  기존 해석이 “진달래꽃”을 사랑의 이별시로 보는 출발점은 “나 보기가 역겨워”다. 즉 나 보기가 역겹다는 진술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해석하는 이유와 근거로 한다. 그러나 “역겨워”는 유별난 진술이다.

   기존 해석대로 따라가서 “역겨워”를 살펴보면, 시의 화자인 내가 역겨운 짓을 했는가? 

  다른 하나는 간다는 사람이 변심해서 나를 역겹다고 하는 것인가? 

  두 가지 경우일 것이다. 그 외에 연인 관계에서 이별을 인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내용의 시에서 “역겨워”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진달래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시다.


   첫 번째, 사랑하는 사람이 역겨워할 짓을 시의 화자인 내가 미래에 하리라고 상상해서 산화공덕에 애이불비 즉 가는 사람을 위해 꽃을 뿌리고 슬프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이별의 시를 쓴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때문에 첫 번째 상황의 가정은 타당하지 않다.     

  두 번째, 가는 사람이 변심해서 시의 화자를 역겹다고 하는 상상의 상황이다. 이 경우는 간단하다. 가는 사람이 변심한 것을 상상한 것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시의 화자가 슬프고 아프지만 생각에 따라서 잡지도 않고 꽃도 뿌리고 눈물도 흘리지 않겠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별을 받아들이는 화자의 태도에 슬픔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표현이 없다. 

  다만 4연에 죽어도 눈물 흘리지 않겠다는 것을 슬픔과 체념으로 해석한다. 100년 동안 기존 해석은 “역겨워”와 “눈물”을 근거로 “진달꽃이” 사랑의 이별시라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시의 화자가 여자라고까지 한다. 그러나 “역겨워”와 “눈물”은 얼마든지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오히려 “진달래꽃”을 존경하던 사람이나, 오랜 동지와의 이별을 상상하는 시로 읽으면 더 자연스럽게 읽힌다. 시 어디에도 남녀 간에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는 호칭이나, 호명, 진술이 없기 때문이다.  

    

  “진달래꽃”의 논리 구조를 보면 간단하다. ‘내가 역겨워 보여서 가겠다고 한다면 잡지 않고 보내겠다. 그리고 가는 길에 꽃도 뿌리겠다. 그러니 그 꽃을 밟고 가라, 가더라도 죽어도 눈물 흘리지 않겠다.’이다. 

  이 논리 구조 속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상상하면서 슬퍼하거나, 괴로워하거나,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는 등, 이별의 정한이 드러나지 않는다. 즉 화자의 사랑의 감정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시의 어조가 당당하고 단호하다. 그래서 “역겨워”와 “눈물”에 근거해서 이별의 슬픔을 체념으로 승화한 자기희생, 유교적 휴머니즘 등의 사랑이나, 이별시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인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단호하고 냉정한 이별의 시로 다가올 뿐이다. 

  더구나 “간다”라는 동사는 ‘가다’에서 온 말이다. ‘가다’ 의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장소 이동이고 이것을 남녀 간에 이별로 읽으려면 반드시 앞에 ‘가다’를 보완해서 남녀 간의 이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진술이 있어야 한다.


  가시리에 “버리고, 님”, 아리랑에 “버리고, 님” 등이 그렇다. 이처럼 명확한 진술이 없을 때 “간다”를 남녀 간에 이별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성이 미약하다. 

  또한 화자는 간다는 사람을 단 한 번도 호명하지 않는다. 때문에 간다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불명확하다. 즉 누가 어디로 간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때문에 시의 화자인 “나”와 간다는 사람의 정체도 모르면서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고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의 화자인 나와 간다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또 연인 관계라고 해석하는 그 둘 사이에 왜 유별나 보이는 “역겨워”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지를 읽어내는 것이 시를 해석하는 첫걸음이다.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전문 - 

    

  제목 “진달래꽃”은 다른 말로 두견화다. 두견화는 중국 촉나라 임금 망제가 위나라에 망한 후 도망쳐 복위를 꿈꾸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고 그 넋이 두견새가 되었다. 그 한이 맺힌 두견새는 밤이고 낮이고 피를 토하고 울고 토한 피를 다시 삼켜 목을 적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한이 서린 피가 땅에 떨어져 진달래 뿌리에 스며들어 꽃이 붉어졌다고 하고 또 꽃잎에 떨어져 붉게 물들었다고도 한다.

  즉 진달래꽃은 나라 잃고 억울하게 죽은 한으로 울면서 토한 피가 뿌리로 잎으로 스며들어 핀 꽃이다.

      

  여기서 살펴야 할 것이 있다. 김소월이 1925년 12월에 간행한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의 표제작을 “진달래꽃”으로 한 이유다. 시집에는 모두 127편의 시가 실려있다. 그중에 한 편인 진달래꽃을 표제작으로 한 것은 그만큼 김소월이 자신의 시집을 대표하는 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진달래꽃을 영변 약산에 피는 그냥 진달래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수령의 외딸이 약산에 찾아왔다가 그 강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고 그 넋이 진달래가 되어 약산을 뒤덮고 있다는 전설 등을 해석에 끌고 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김소월이 나라 잃고 억울하게 죽은 한으로 두견새가 되어 피를 토하고 그 피가 스며 붉게 핀다는 진달래꽃을 시 제목으로, 나아가서 시집의 제목으로 한 것이다. 때문에 시의 화자인 나는, 나라 잃은 조선 민족이다. 동시에 나라 잃고 억울하게 죽은 한으로 토한 피가 뿌리로, 잎으로 스며들어 붉게 핀 진달래꽃이기도 한 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시, 1연 -    

 

  나라 잃은 망국의 한으로 피를 토하고 우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이다. 문맥이 막히지 않는다. 앞서 유별나 보이던 “역겨워”라는 단어를 김소월이 왜 사용했는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역겨워”는 나라 잃고 억울하게 죽은 한으로 피를 토하고 우는 나 보기가 역겹다는 것이고 그래서 가겠다고 한다면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겠다는 것이다. 

  이 첫 연을 사랑의 이별시로 읽으면 “역겨워”에서 걸린다. 즉 병적 자기 낮춤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이것은 김소월이 “역겨워”로 이 시가 사랑의 이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뒤에 3연 “사뿐히 즈려밟고” 역시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2연에서 그 많은 꽃 중에 왜 “진달래꽃”을 뿌리겠다는 것인지도 설명되지 않는다. 

  나라 잃고 억울하게 죽어 피를 토하고 우는 나 보기가 역겹다는 것은 왜정시대 나라 잃은 조선 민족이 역겹다는 것이고 그것은 친일파를 의미한다. 때문에 가는 사람은 친일파이고, 변심은 사랑의 변심이 아니라 변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라는 진술이 당당하게 읽히는 이유다. 

  여기서 “고이”는 조롱이다. 민족을 배신한 변절자를 잡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 잃은 조선 민족을 역겨워하고 변절해서 가고 싶으면 잡을 가치도 없으니 가라는 의미다. “역겨워”는 변절자인 친일파가 조선 민족을 역겨워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오히려 조선 민족에게 변절자인 친일파가 역겹게 보인다는 역설의 의미로 읽힌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시, 2연 -   

  

  영변 약산에 진달래꽃이 유명했다고 한다. 아마도 진해 벚꽃 같은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영변 약산을 뒤덮은 진달래꽃을 즉 나라 잃고 억울하게 죽어 토한 피가 스며 붉게 핀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변절하고 가는 길에 뿌리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변절하겠다면 해보라는 의미다. 

  나라 잃은 조선 민족을 역겨워하면서 변절하겠다면 나라 잃은 조선 민족의 피를 토하는 한을 가려는 길에 뿌려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친일파로 변절하는 것이 조선 민족에게 어떤 짓이고 어떤 의미인지 가르쳐 주겠다는 말이다. 조선 민족 변절자에 대한 김소월의 강렬한 분노를 보여주고 있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시, 3연 -  

   

  “가시는 걸음걸음”, 변절자의 걸어가는 걸음을 걸음걸음이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조롱이다. 특히 “사뿐히 즈려밟고”라는 진술이 간단하면서도 세세한 묘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변절자의 발걸음은 너무나도 가벼울 것이다. 민족을 배신하고 변절해서 친일파가 되는 발걸음은 가볍고 희망에 부푼 것이다. 그래서 걸음걸음이고 사뿐히다. 그런데 변절자인 친일파가 밟고 가는 땅은, 나라 잃고 억울하게 죽은 피를 토하는 조선 민족의 한이다. 그래서 변절은 그 한을 “즈려밟고” 즉 짓밟는 짓이라는 것을 세밀하게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시 전체에 존대법을 사용한 이유를 살펴야 한다. 김소월이 시집 “진달래꽃” 127편에서 존대법을 사용한 시는 많지 않다. 그러나 유독 ‘진달래꽃’이라는 소제목으로 나뉘어 있는 15편의 시 중에 13편에 존대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진달래꽃”에 사용된 존대법은 유달라 보인다. 이것은 존대가 아니라 역설적 조롱이다. “가시옵소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옵소서’라는 어미를 사용해서 변절자인 친일파에게 정중한 부탁이나 기원을 하는 듯 보이게 한 것은 역설의 조롱인 것이다. 이 3연에서 조롱이 절정에 이르러 있다. 

  조선 민족 누구든 변절해서 친일파가 되겠다면 나라 잃은 조선 민족의 피를 토하는 한을 짓밟고 “가시옵소서” 라고 한다. 즉 변절이 조선 민족의 나라 잃고 억울하게 죽은 피를 토하는 한을 “즈려밟고” 즉 짓밟는 짓이라는 사실 인식을 시켜주면서 ‘그래도 변절할래?’ 분노하면서 조롱하는 의미로 존대법을 사용한 것이다. 시 전체에 존대법이 사용된 이유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시, 4연 - 

    

  “죽어도 아니 눈물”은 강조를 위한 도치다. ‘죽어도 눈물 아니 흘리오리다’보다 더 강력한 경고의 의미다.

  나라 잃고 억울하게 죽은 피를 토하는 조선 민족의 한이 역겨워 변절하겠다면, 그때는 죽어도 눈물 흘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죽어도”는 눈물 흘리지 않겠다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단호한 결심을 의미한다. 즉 조선 민족 누구든 변절해서 친일파가 되려고 한다고 해도 죽어도 슬퍼하지 않겠다. 그러니 갈테면 가라, 변절하려면 변절해서 친일파가 되라는 것이다. ‘꺼지라’라는 말이다.

  여기서 “눈물”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조선 민족을 배신하고 변절해서 친일파가 되려는 사람에 대한 민족애의 슬픔이다. 그래서 “죽어도”는 변절자에 대한 단호한 극단의 단절을 강조하는 진술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친일파로 변절하려는 불특정 다수의 조선 민족에 대한 역겨움과 분노와 조롱과 단호하고도 강력한 단절의 마음을 드러내는 경고의 시인 것이다. 때문에 시 어디에도 남녀 간에 사랑이나 이별을 의미하는 호칭이나, 호명이나, 진술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1922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그해 9월 조선 총독으로 온 *사이토 마코토가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 민족 분열 정책을 시작했다. 사이토 마코토는 적극적으로 친일파를 발굴하고 육성하고 지원했다. 사이토 마코토의 민족 분열 책동에 대해서 이상 역시 오감도 시제1호에서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다. 때문에 김소월도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일어나는 민족 변절자와 친일파의 등장에 대해 자신의 민족정신을 드러내는 시를 쓴 것이고 그래서 시집 제목을 “진달래꽃”으로 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 간단한 시를, 100년 동안 사랑의 이별시로 오독한 것은 사이토 미코토에게 포섭당한 친일파들 때문이 아닐까?



  *총독부는 각종 친일 어용단체를 조직하는 일에도 적극 나섰다. 1920년 사이토 총독에게 보고된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이라는 문서를 보면, “친일분자를 귀족 · 양반 · 유생 · 부호 · 실업가 · 교육자 · 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그 계급과 사정에 따라 각종 친일단체를 조직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이후 조선경제회, 대정친목회, 국민협회, 동광회, 대동사문회,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유교진흥회, 시천교, 청림교, 상무단(보부상) 등 각계각층에 친일단체가 조직되었다. 또 총독부는 조선인 귀족 · 관료 · 교사 · 유생 등을 모아 일본 시찰을 보냄으로써 그들을 회유하고, 더 나아가 적극적인 친일분자로 육성하고자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이토 총독의 이른바 ‘문화정치’ (한국독립운동사, 2014. 5. 30., 박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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