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왕십리 오독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비는
올지라도 한닷새 왓으면죠치.
여드래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로 朔望이면 간다고햇지.
가도가도 往十里 비가오네.
웬걸, 저새야
울냐거든
往十里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마자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天安에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저젓서 느러젓다데.
비가와도 한닷새 왓스면죠치.
구름도 山마루에 걸녀서 운다.
-시, 왕십리 전문-
시 왕십리는, 왕십리에 사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생각된다. 소월이 왕십리에서 보았거나, 들었거나 한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다. 소월 즉 시적화자가 1인 2역의 판소리 소리꾼이 된 듯 시를 진행시켜 나간 것이다. 그러니까 시적 화자가 소리꾼 역할을 하면서 2명의 관점에서 진술하는 시를 실험한 것이라고 해도 될까? 시 왕십리는 하나의 시 형태를 보이지만 두 개의 시다. 즉 시적 화자의 진술이 하나이고 시적 화자가 주인공 여인의 진술을 받아 적듯 1인 2역의 소리꾼으로 진술하는 다른 하나로 나뉜다. 그런데 여기서 시적 화자의 진술은 독자에게 이야기의 정보를 전달하거나 정서를 끌어올리거나 마무리하는 보조적 의미이고 시의 본류는 주인공 여인의 진술이다. 그것을 두 개의 시로 분리해서 읽으면 오히려 시 왕십리가 쉽게 해석된다. 아무튼 소리꾼 역할의 시적 화자인 소월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인 왕십리에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여인을 제외하고도 숨겨진 등장인물이 두 명 더 있다. 사실 시적 화자인 소월을 제외한 이 세 명의 이야기가 시의 시발점이고 종착점이다. 시적 화자인 소월의 진술은 좀 더 냉정하게 말한다면 소리꾼보다는 판소리 북을 잡은 고수의 추임새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여인의 소리를 받아 적듯 한 여인의 진술 역시도 소월의 창작이다. 우선 소월이 100년간이나 꽁꽁 숨겨둔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 등장인물은 1연 /오누나/오는비는/올지라도 한닷새 왓스면 죠치//라고 말하는 여인이다. 왜 여인인가? 4연에 등장하는 /天安에삼거리 실버들도/촉촉히저젓서 느러젓다데./에서 천안에 삼거리 촉촉이저젓서 느러진 “실버들” 때문이다. 여기서 촉촉이저젓서 느러진 실버들이 여인을 비유한 것이다. 때문에 어렵지 않게 두 번째 등장인물이 천안에 사는 여인임이다.
따라서 다시 첫 번재 등장인물인 왕십리에 사는 여인이 왜 여인인가로 돌아가면 “느러젓다데” 때문이다. 이것은 시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왕십리 여인의 진술이고 또한 퉁명스러운 말투로 느껴진다. 만약 왕십리 여인과 “실버들”이 한 남자를 나눠 가져야 하는 연적관계라고 한다면 이 말투에서 질투와 체념의 느낌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시 왕십리에서 이런 추정에 반하는 내용을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여자를 질투하는 것은 여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또 다른 추론으로 첫 번째 등장인물인 왕십리에서 님을 기다리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여인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추론에 추론을 거듭한 듯하지만, 두 여인을 연적관계로 시를 읽을 때만 시 왕십리가 자연스럽게 읽힌다. 그리고 두 여인은 왕십리와 천안에 사는 것으로 드러나 있다. 시적 화자의 진술에 나타난 정보를 더 세세히 살펴보면 두 여인 사이 즉 왕십리와 천안삼거리를 “여드레 스므날에” 왔다가 초하로 삭망에 가는 세 번째 등장인물이 있다. 그 세 번째 등장인물이 남자이면서 두 여인의 님이라는 것은 애당초 알았을 것이다.
왜 님인가? “촉촉이저젓서 느러젓다데”가 근거다. 덧붙이면 왕십리 여인은 울면서 기다리고 천안의 여인은 촉촉이저젓서 느러졌기 때문이다. 뭔 말인가? 여인을 울게도 하고 촉촉이젓게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님뿐이라고 생각한다.(나 참, 여기까지) 앞서 밝혔듯이 시 왕십리는 이 세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소월이 1인 2역의 판소리 창을 하듯 시로 전개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 왕십리는 고도로 압축된 서사시라고도 할 수 있다.
시 왕십리에서, 오는 존재는 비와 님이다. 그러나 님은 오는 존재이면서 가는 존재이다. 즉 “여드래 스무날”에는 오고 “초하로 朔望이면” 가는 존재다. 그처럼 날짜를 정해 놓고 오고 가는 것으로 보아, 님은 아마도 장날에 맞춰서 지방과 왕십리를 오가던 상인이 아닐까 짐작된다. 더구나 비를 이유로 정기적 왕래의 약속을 취소시킬 수 있는 다른 상황이나 직업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여기서 님은 상인이면서 왕십리에 사는 본처의 남편이거나 또는 둘째 부인의 남자일 수도 있다. 왜 본처 또는 둘째 부인인가? 하는 것은 뒤로 가면서 밝히겠다. 그래서 첫연의 “한닷새 왓으면죠치”의 대상은 비가 아니라 두 여인 사이를 오가고 있는 님이다.
소월이 살던 시대에는 비가 오면 시장은 파장이다. 때문에 비가 오면 장터 또는 시장을 중심으로 장사를 하는 상인과 그와 관련된 대부분의 일정이 취소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가 와서 님이 오지 않는다는 상황이 어색하지 않다.
첫 연 2행부터 4행까지의 /오누나/오는비는/올지라도 한닷새 왓으면죠치./라는 진술은 그러한 사정에서 터져 나온 여인의 한탄을 소월이 창작적으로 옮겨 적은 것이다. 때문에 비가 오더라도 님이 와서 한 5일만이라도 머물렀으면 좋을 텐데 무정한 님은 비가 온다고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한닷새”, 즉 5일인가?
두 번째 연에서 시적 화자의 “여드래 스무날”에는 오고 “초하로 朔望이면”간다는 진술을 다시 살펴 계산하면, 님은 왕십리에 와서 7일이나 11을 머물다 가는 것이다. 그래서 비가 와도 7일이나 11일은 아니더라도 “한닷새” 머물다 가라는 것인데 여인의 마음과 달리 님은 오지 않는다.
이어서 두 번째 연 4행 /가도가도 往十里 비가오네./는 그리하여 왕십리 어느 구석이라도 행여나 비가 오지 않는 곳이 있다면 님에게 왕십리에 비가 안 오는 곳이 있으니, 어서 오라고 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빗속을 헤매 다니는 여인의 울음 섞인 탄식을, 역시 소월이 1인 2역의 소리꾼으로 받아 적듯(물론 슬픔의 정서를 끌어올리기 위한 소월의 창작이지만) 여인의 관점에서 진술하는 것이다. 이 진술을 다르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인의 진술일 때만 시의 흐름과 의미가 1연 2,3,4행 그리고 3연 4행과 이어져 무리 없이 읽히기 때문이다.
//웬걸, 저새야/울냐거든/往十里건너가서 울어나다고,/비마자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그리고 3연, 웬걸, 비가 와서 좋다고 새가 운다. 소월은 당황한다. 여인은 비 때문에 님이 오지 않는다고 우는데 새는 비가 온다고 좋아서 운다. “저새야, 울냐거든”은 소월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진술이다. 저 새야 울지 말거라, 꼭 물어야 한다면 “왕십리 건너가서” 여인이 슬피 울며 빗속을 헤매 다니는 왕십리 밖으로 가서, “울어나다고” 즉 여인이 듣지 못하게 울어달라는 부탁이다. 왜? 비가 온다고 기뻐서 우는 새소리를 들으면 비가 와서 우는 여인의 슬픔이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새는 이미 “비마자 나른해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여인도 그 사실을 알기에 부러우면서도 서러워서 /비마자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라는 잔잔한 탄식의 진술로 슬픔에 체념을 보태고 있다. 특히 여기서 소월은 “우는 새”라고 진술하고 여인은 “나른한 벌새”라고 새의 종을 명시해 진술한다. 그래서 이 3연 또한 한 사람의 진술 즉 한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天安에삼거리 실버들도/촉촉히저젓서 느러젓다데./비가와도 한닷새 왓스면죠치./구름도 山마루에 걸녀서 운다.//
마지막 4연 첫 행부터 “/천안에삼거리 실버들도/촉촉이저젓서 느러젓다데./”가 나온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저젓서 느러젓다” 역시 여인의 한탄을 소월이 받아 적듯 여인의 관점으로 진술한 것이다. 앞서 비마자 나른해서 우는 벌새와 같은 의미인, 만남의 기쁨으로 읽힌다. 그래서 실버들에 보조사 ‘도’를 붙여 비마자 나른한 벌새와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을 같은 의미로 진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느닷없어 보이는 삼남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교통의 중심지 천안의 등장은 앞서 님의 직업이 왕십리와 지방을 오가는 상인으로 추정하는 근거를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인이 기다리는 님이 천안과 왕십리를 오가는 상인이라는 확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인은 아마도 의무적으로 천안에서 왕십리로 출발하기 전에 날씨를 확인했을 것이고 왕십리에 비가 내리는 것을 알고는 갈 수 없다고 한 것이리라. 당시의 전갈 수단으로는 가장 빠른 것이 전화나 전보였을 것이다. 만약 기다리는 님이 상인이 맞다면 비 오는 왕십리로 가지 않고 천안에 머물겠다고 하는 것이 상식에 합당한 결정일 것이다. 비 오는 왕십리로 가면 장사를 망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천안에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저젓서느러젓다데/는 앞서 살폈듯이 질투와 체념의 심정을 내포한 것이다. 즉 한 달이 30일이니까 님은 그중 왕십리에서 머무는 것이 18일이고 나머지 12일은 왕십리가 아닌 곳에서 머무는 듯하다. 때문에 왕십리에 사는 여인을 본처쯤 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이 본처쯤 되는 여인이 님을 향해, 오는 비를 핑계로 천안에 눌러앉아 있는 것 아니냐는 원망과 “실버들”에게는 질투의 심정 드러내고 있다. 천안에 또 다른 여인이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천안에 내린 비는 현실의 비가 아니고 체념한 왕십리 여인이 질투심으로 상상하는 은유의 비로 읽힌다. 운우지정의 비로 말이다. 그래서 “다데”가 질투로 읽힌다.
이어서 /비가와도 한닷새 왓스면죠치/가 1연에 이어서 반복된다. 왜 이렇게 반복될까? 또 다른 의미가 있어서다. 앞서 살폈듯이 님은 여드레 스므날에 오고 “초하로 삭망”에 간다. 만약 여드레에 안 오면, 즉 한번 거르면 합쳐서 20일을, 스므날에 안 오면 18일을 기다려야 다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오지 않는 것보다 와서 한닷새라도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왕십리 여인의 바램이 간절하고 절실할 수밖에 없는 것을 수긍할 수 있다. 특히 “왓스면”은 이미 모든 일이 되돌릴 수 없이 끝나버렸다는 체념의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천안에 사는 여인의 바램은 그 반대일 것이다. 이렇게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두 지역 여인들의 사정으로 앞을 다투어서 왕십리에 오는 비 소식이 천안으로 날아갔을 것이고 반대로 천안에 삼거리 촉촉이저젓서 느러진 실버들 소식 역시 왕십리로 달려왔을 터이다. 때문에 “촉촉이 저젓서 느러젓다데” 라는 왕십리 여인의 진술이 가능한 것이고 왕십리 여인의 원망과 한탄과 체념이 절정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다.
소월은 4연 끝 행에서 시적 화자, 즉 자신의 목소리로 돌아와서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로 여인의 슬픔을 토닥이면서 숨을 고른다. 그리고 시를 마무리 한다. 이처럼 생생한 이야기가 숨어있는 왕십리는 한 편의 서사시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적 화자에게 1인 2역의 소리꾼 역할을 부여해서 이야기의 주인공과 시적 화자가 번갈아 진술하는 치밀한 구조다. 짧은 시안에 어쩌면 방대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녹여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흥미진진하게 빚어내고 있다.
여기서 떠올려야 할 것이 있다. 소월이 왕십리를 1923년 『新天地』에 처음 발표했을 당시에는 제목 옆에 “(民謠詩)”라고 병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왜일까? 소월이 민족적 전통 정서와 리듬, 정과 한, 민요의 3음보 등을 계승한 시를 쓰고 있었고 또 이미 알려져 있었는데 구태여 제목 옆에 민요시 라고 병기한 이유가 뭘까? 민요 형식의 내용, 즉 여인의 한을 담은 우리 전통민요의 노랫말과 유사한 이야기임을 밝히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시적 화자를 1인 2역의 판소리 소리꾼 역할로 시의 무대에 올려 실험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즉 시에 숨겨 둔 이야기와 시의 구조와 전개방식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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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왕십리를 두 개 시로 분리해서 하나는 소월의 진술, 또 하나는 여인의 진술로 나누면 앞서의 해설을 더욱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왕십리
비가 온다 (소월)
오누나(여인)
오는비는(여인)
올지라도 한닷새 왓으면죠치.(여인)
여드래 스무날엔(소월)
온다고 하고(소월)
초하로 朔望이면 간다고햇지.(소월)
가도가도 往十里 비가오네.(여인)
웬걸, 저새야(소월)
울냐거든(소월)
往十里건너가서 울어나다고,(소월)
비마자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여인)
天安에삼거리 실버들도(여인)
촉촉히저젓서 느러젓다데.(여인)
비가와도 한닷새 왓스면죠치.(여인)
구름도 山마루에 걸녀서 운다.(소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