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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섭 Apr 21. 2023

엿장수와 예술과 평론

  어린 시절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읍내에 있는 작은 동네였지만, 엿장수들이 엿 팔러 많이도 찾아왔다. 그런데 오는 엿장수마다 엿가락 장단이 달랐다. 이 엿가락 장단에 홀려 엿을 사 먹기도 했고 또 별 시원찮으면 사 먹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엿장수가 올 때마다 엿장수를 따라다니면서 엿가락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아이들이 있었다. 별 놀거리도 없는 시절이었고 또 시골이었으니 나름 재미있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엿장수가 있고 또 그 엿장수 엿가락 장단에 늙어 죽을 때까지 춤을 추는 생계형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세상살이하면서 알게 되었다.

      

  평론은 예술에 대한 감탄사일 뿐이다. 따라서 평론은 학문일 수는 있어도 예술은 아니다. 학문이 될 수 없고 또한 학문이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론은 예술가 개개인이 창조하는 것이고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예술은 천재만이 할 수 있다. 나머지는 흉내 내기다. 그런데 흉내 내기만으로도 위대한 예술가일 수 있다. 천재는 1세기에 하나 형벌처럼 나올까 말까 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흉내 내기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천재라고 착각하고 천재병에 걸린다. 그래서 어처구니없게도 관객과 독자를 버리고 평론으로부터 천재임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예술에 대한 감탄사일뿐인 평론이 예술을 지배하게 되는 이유다. 이렇게 예술은 망하고 진정한 예술은 1이고 나머지 99는 사기가 되는 구조를 완성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교만해진 평론은 예술을 발아래 놓는다. 주객전도(?), 본말전도(?) 심지어 평론과 예술이 작당하기도 하고 종속되기도 한다. 나아가 예술이 학문에 편입되려고 안간힘이다. 따라서 예술은 사라지고 엿가락 장단에 춤추는 생계형 아이들이 예술을 지배하게 된다. 대단히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딱 한 분만 언급하겠다. 그것도 익명으로.....

  한국 문학 평론을 이끄셨던(?) 이미 고인이 되신 평론가 K모다. 

  K모 평론가가 백석이 북한 공산정권에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살려달라고 비는 자아비판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한국 현대시에 가장 빛나는 서정시”라고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자아비판서 형식의 반성문이 서정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K모 평론가가 시를 제대로 해석했다면 과연 한국 현대시에 가장 빛나는 서정시라고 했을까? 이것이 희극도 비극도 아닌 평론의 본모습이다.  

   

  평론은 예술에 대한 감탄으로 돌아가고 예술은 천재 흉내 내기로 돌아가기 바란다. 이것이 예술을 살리는 길이고 평론이 학문으로 빛나게 되는 길일 것이다. 물론 지극히 어리석은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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