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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섭 Jun 06. 2023

시 창작의 진실 문제 -강희근시인

김유섭 <이상 오감도 해석> <한국 현대시 해석>

시 창작의 진실 문제 -강희근 시인(경남문학, 여름)  

   

  국립경상대학 명예교수신 강희근 시인께서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시 창작의 진실에 대해 “시 누리기와 창작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경남문학 여름호에 발표한 글에서 부분 발췌한 것입니다. 

     

  ....중략. 시는 시인이 자기 생의 정서와 아름다움과 감격과 애환과 서사적 예지를 나름의 언어로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한 유기체이다. 학생, 또는 독자는 시를 자기 감성으로 자유롭게 편하게 즐겁게 누릴 주권이 있다. 독자 주권이다. 이를 방해하는 걸림돌은 걷어치워야 한다. 시 누리기는 지상의 모든 독자들이 시라는 티켓을 쥐고 행복의 시간으로 들어가면서 생기는 생기는 공간이요 시간이다. 

    

 2. “창작의 진실” 문제     

  최근 우리 시단 일각에서 “창작의 진실” 문제가 불거졌다. 말하자면 시 작품에서는 시인이 애초에 노렸던 의도가 있어서 그것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젊은 시인 김유섭(남해 출생. 김만중문학상 수상)이 발간한 『이상 오감도 해석』(2021, book속길)이 그 1탄이고 이어서 낸 김유섭의 『한국 현대시 해석』(2023, book속길)이 그 2탄이다.

  시 해석을 기왕에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달리 옳게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일단 일별해 볼 때 이상 시 해석에 있어 새로움은 코드 찾기였다. 그는 <시작하는 말>에서 “오감도는 난해한가? 난해하지 않다. 오히려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독자의 가슴과 머리를 천둥 번개의 충격과 열정으로 내리쳐서 삶과 인생을 바꿔버린다. 이것이 천재의 것이다. .....이상은 일본 왕의 주둥이를 막아 죽이고 함께 죽겠다고 했던 결사항전의 시인이었다. 시로 1인 독립전쟁을 한 전사였고 게릴라였다.”

  그렇다면 이런 정신을 직설로 표현하면 바로 총살당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김 시인이 찾아낸 것이 ‘이상식 한자 조합단어, 한문, 한글의 병행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상징’ ‘행위상징’ ‘시각상징’이 있고 또 ‘설계도 형식’과 ‘그림 그리기 작법’ 등을 찾아 시로써 일제를 조롱하고 비판했던 것으로 파악했다.

  시인 이상은 그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수법으로 시를 써서 일제 마수를 피했다. 「오감도」 15편 연작시는 그 표현 수법을 알아차린 김유섭 시인을 기다려 스스로의 시 창작적 진실을 내보인 것이다. 시의 일반적인 외형이나 진술이 시라면 그 속에 감추어진 시인의 의도는 따로 있을 뿐만 아니라 있더라도 쉽게 노출되지 않는 경우 창작적 진실은 안갯속일 것이다.


  김유섭 시인은 안개에 싸인 그 진실을 『한국 현대시 해석』을 통해 김소월, 백석, 한용운, 김수영 등의 몇 편 시를 소화해 내고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사랑의 이별시’가 김소월 창작자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유섭은 “진달래꽃”을 중국 촉나라 망제의 한과 유관한 왕위 복원에 실패한 두견화에 비김으로써 조선 민족이 나라 잃고 서러워하는 식민지배의 상황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는 남녀 사랑과 유관한 역겨움이 아니라 “나라 잃은 망국의 한으로 피를 토하고 우는 조선 민족인 ‘나’를 보기가 역겨워한다면 말없이 그냥 보내드리겠다는, 그런 표명이라는 것이다. 내가 역겨워 가는 실체는 이른바 친일파라는 것이니 피를 토하는 꽃인 진달래꽃을 밟고 가려면 가라는 것이다.” 친일파에 대한 저주와 조롱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았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내린다.// - 백석(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략

  이 시는 연애 시가 아니다. 이 무렵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어 사용금지 등 조선 민족 말살정책을 극단으로 몰아갔다. 중일전쟁 중에 인력수탈, 물자수탈 등 폭악 지배가 극렬한 상태였다. 다음 몇 가지를 주목해서 보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와”로 이어진 동일체로 읽힌다.

  *내가 나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다(형벌의 눈)는 것은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나타샤는 상상의 존재다. 러시아 백인 여성으로 보면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며’이며 백의     민족 이미지다.

  *조선 민족을 갑돌이 갑순이로 부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왜 가난한가? 수탈당하는 식민지 노예이기 때문이다.

  *왜 산골로 가는가? 일제 수탈의 현장이 더러워서 피해 가려는 것이다.

  *산골에 뱁새(출출이)가 우는 마가리(오두막집)는 식민지 노예로 사는 상징적 배경일 것이      다.

  *주권 회복의 희망을 태우고 나타냐야 할 백마가 흰 당나귀로 전락해서 우는 것을 응앙 응     앙이라 하고 있다. ‘응앙’도 ‘으아’로 절규하는 소리를 내지 않고 어린 울음소리로 냄으로     써 상황에 탈을 씌운 것이다.     

  김유섭은 이를 요약하여 “조선 민족 청년 백석은 조선 민족을 악랄하게 수탈하는 일본 폭압의 식민지배에 굴복할 수 없다고 저항하고 한탄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도피를 선택하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도피처로 가는 것이지 사랑을 구가하기 위해 마가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여기까지 정리해볼 때, 

  이상의 「오감도」 내면에 감추고 있는 ‘창작의 진실’은 난해를 위한 난해도 아니고 방법론으로의 슈르리얼리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진실적 의도는 총독부 건축 기사인 이상은 그 복마전에서 도저히 희희낙락할 수가 없고 나라 잃은 민족에게 부단한 각성을 바랐던 것이다. 「오감도」 연작시 15편은 결사항전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스스로 1인 게릴라로 임했던 것, 그것이 창작 의도라는 지적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별리를 노래한 사랑시가 아니다. 두견처럼 우는 민족의 식민 피지배 상황에서 나라를 배반하는 이들이 늘어나므로 우리를 떠나 일신의 안위에 급급해 하는 자들에게 떠나려면 떠나라고 저주의 꽃을 뿌린다는 데 그 의도가 있다. 일제 총독의 민족 분열정책에 놀아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안타까운 심정의 시라는 것이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역시 한 편의 연애시가 아니라는 지적이었다. 이 시가 발표된 1938년 상황은 그 전해에 일으킨 중일전쟁이 진행 중이고 따라서 인력 수탈, 물자 수탈 등으로 백성이 백성일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런 역사를 사는 신문사 기자 출신인 그는 이 시기의 남자로서의 사랑에 먼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촉발적 사랑이 앞서고 있었다는 것이다.그런 역사주의 의식으로 가난한 시대, 눈이 오는 시대, 산골로 피해 가는 시대라면 무엇이겠는가. 일단 연애 또는 연애 사태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김유섭은 이를 시의 유기체가 갖는 유기성이 무엇에 잇닿아 있는가를 살피고 있다.  

   

  다음에 김유섭의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 등 4편에 대한 해석이 있지만 필자로서는 김수영의 「풀」 해석이 더 이채로워 보인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중략     

  김수영의 「풀」은 가장 비김수영적이라 하기도 한다. 김수영의 시는 후반기 멤버로서 시 174편(필자의 기억)이 전반적으로 모더니즘의 음영이 짙은 것들이다. 우선 난해하다. 그리고 시가 산문성을 띠는 작품이 많은데 이 「풀」은 순우리말이고 단조롭고 문맥적 난해는 없다. 김유섭은 시의 유기체 면에서 보면 앞뒤 부딪치는 부분이 있는 것을 분석하고 ‘동풍’에 주목했다.

  이 시는 김수영이 1968년 6월 16일 사고로 영면하기 20일 전에 쓴 시로 『현대문학』 8월호에 실렸다. 시가 완성된 시점은 1968년 5월 29일이었다. 김유섭은 문맥상 “비를 몰아오는 동풍과 풀이 자연 현상이 아님을 간파하고 1968년 봄의 역사적 사건들을 추려본 결과 김수영이 절대 묵과할 수 없는 ‘3선 개헌’이 눈에 잡혔다. 3선 개헌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공화당의 장기 집권의 과도기적 과정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를 초점에 놓고 ‘풀’은 ‘민주주의’로 연계 관계의 한쪽 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김유섭은 이 두 사항을 대입시켜 「풀」을 다음과 같이 풀었다.     

  //민주주의가 병들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3선개헌에 나부껴/민주주의는 병들어 눕고/드디어 울었다/현실이 희망이 없어서 더 울다가/다시 병들어 누웠다//민주주의가 병들어 눕는다/3선개헌보다 더 빨리 병들어 눕는다/3선개헌보다 더 빨리 울고/3선개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현실이 희망이 없고 민주주의가 병들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3선개헌보다 늦게 누워도/3선개헌보다 먼저 일어나고/3선개헌보다 늦게 울어도/3선개헌보다 먼저 웃는다/현실이 희망이 없고 민주주의 근본이 병들어 눕는다

                           - 김유섭, 「풀」을 해석한 전문 

    

  시에서 시인의 창작의 진실을 붙들어 풀면 맛보기로 누리기보다는 뜻의 직접성은 있지만 상상과 이미지 연상의 부드러움이 약해 보인다. 이런 현상을 가지고 창작의 진실이 맛보기에 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창작의 진실은 시인의 본질적 의도이고 맛보기 이론은 그와 무관하게 빚어내는 유기체 통합의 실현이다. 창작적 진실이 끝내 맛보기와 따로 가는 것이라도 진실의 캐내기를 무용하다고 할 수는 없다. 연구에서 얻어낸 창작적 진실이 시간을 두고 일반화되면 그 부분이 시적 유기체에 덧붙여져서 작품 유기체는 변형 확충되기에 이른다. 그럴 때 그 시는 확충된 새로운 유기체로 독자 앞에 놓이게 된다. 맛보기는 그때보다 다른 줄기의 감성적 형용으로 진전이 될 것이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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