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절규
얼마 전 모 공중파 방송에서 여장한 경성고공 졸업사진 속에 이상을 보고 출연자들이 충격이라는 둥, 의정부 고등학교 졸업식.....
이상을 시대를 앞서간 천재라고 하면서 그 이유로 기행과 난해한 시 등, 참으로 궁색한 망상의 말들을 늘어놓는다.
이상이 천재라면 그의 작품 속에서 천재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작품을 읽어내지 못하는 까닭에 천재와는 무관한 시인의 삶과 신변잡기로 천재를 설명하려는 암흑의 망상을 당당하게 펼쳐놓는다. 교만이고 폭력이고 비극이다.
김소월, 한용운, 백석, 김수영의 시에 대한 해석 역시 다르지 않다.
시는 망상이 아니라 행복이든 사랑이든 이별이든 절망이든 불행이든 그 무엇이든 그 시대의 절규라는 것을 보여 주는 시인들이고 작품들이다. 한국 현대시 100년에 이상 김소월 한용운 백석 김수영에 가해진 교만한 오독의 폭력에 대해 이제는 말해야 한다.
이상은 왜 여장을 하고 경성고공 졸업사진을 찍었을까?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그런데 필명 ‘이상’을 언제 만들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널리 알려진 경성고공 시절 필명 이상을 쓴 거 같다는 이상의 친구인 원용석의 증언과 경성고공을 함께 다닐 때 ‘이상’이라는 필명을 해서체로 써서 자신에게 보여 주었다고 말한, 이상의 건축과 동기였던 일본인 오오스미의 증언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바로 이상이 여장을 하고 찍은 경성고공 졸업사진이다.
김해경의 필명 ‘이상(李箱)’은 이상식 한자 조합단어다. 그 의미는 제국주의 일본의 형벌을 조사하고 심리해서 무덤으로 보내겠다. 즉 멸망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국주의 일본의 형벌 즉 죄가 무엇인가?
여장을 하고 경성고공 졸업사진을 찍어 이상은 제국주의 일본의 죄가 무엇인지 외쳐 알리고 있다. 이는 오감도 시제5호 “익은불서 목대불도”로 이어지고 시제6호 “소저는 신사 이상의 부인이냐”와 소설 날개의 두 번째 삽화(상체는 여자이고 하체는 남자)와 연결되어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장한 이상의 경성고공 졸업사진은 오감도에서 보여 주는 ‘시각상징’과 같다. 즉 무력과 폭력을 앞세운 제국주의 일본의 강제한일합방은 남자인 조선에 맞지 않는 여자 옷을 입힌 꼴이고, 덩치만 커졌지, 날개가 커도 날지 못하고 눈이 커도 보지 못하는 괴물을 만든 실패한 것이다.
여기서 조선을 남자로 제국주의 일본을 여자로 표현한 것은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조롱이다. 남존여비 사상이 시퍼렇게 남아있던 1930년대 조선을 남자, 남편 그리고 제국주의 일본을 여자, 부인으로 칭해서 조롱하고 있다. 시제6호에서 “소저는 신사 이상의 부인이냐”라는 진술로 확인해준다.
소설 날개에서는 두 번째 삽화,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 준다. 상체는 여자 하체는 남자로 그려서 강제한일합방이 괴물을 만든 실패한 것이며 앞선 글에서 이미 밝혔지만, 상체인 여자는 조선 총독부를 의미한다. 하체인 남자는 조선총독부 폭압의 식민지배에 수탈당하는 조선민족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상이 여장을 하고 경성고공 졸업사진을 찍은 이유가 명확하다. 이러한 이상의 처절한 외침을 짓밟고 덮어버린 것은 참혹하고 교만한 오독이다. 여장한 이상의 경성고공 졸업사진을 보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와 좌절을 느끼지만, 어쩌겠는가? 오독이 시를 죽여버린 시대인 것을. 시에서 시대의 절규가 거의 사라져버린 것이 오래되지 않았는가!
내 흐린 기억으로는 30~40년 전 한국 영화는 시에서 무엇이든 배우려고 했다. 시에서 한국 영화가 무엇을 배웠을까? 시대인식과 시대의 절규를 배워갔다. 시에서는 거의 사라져버린 시대의 절규를 봉준호와 박찬욱이 영화로 보여 주고 있다.
봉준호는 “기생충”에서 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미쳐가는 처절한 현대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자세한 해석은 ‘다음 브런치’, 네이버 블로그 ‘찬란한 봄날’에 있음)
박찬욱은 정신병자에 가까운 극단적인 이기주의자 남녀 주인공을 내세워 21세기 왜곡되어 병든 삶과 사랑을 보여 주면서, 현대인에게 극단의 이기적이고 병든 삶과 사랑과 이별할 결심을 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자세한 해석은 다음 블런치, 네이버 블로그 ‘찬란한 봄날’에 있음)
요즘 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의 절규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