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을 때도 나는 장례식에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의 비석을 제막할 때는 망우리 산소에 나간 기억이 있다.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이 유치한, 말발도 서지 않는 후기.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원정(園丁)’이 다 뭐냐? ‘배코니아’가 다 뭣이며 ‘아포롱’이 다 뭐냐?
- 박인환(1966. 8.), 김수영 산문-
박인환이 죽은 지 무려 10년도 더 지난 뒤에 김수영이 쓴 글이다. 이 글에서 김수영은 박인환의 시와 시적 재능에 대해 경멸하고 있다.
“값싼 유행의 숭배자”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이 유치한” 등의 문장으로 김수영은 박인환의 시를 경멸한다. 또한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으로 박인환은 시인도 아니라고 일갈하고 있다. 즉 김수영에 따르면 박인환은 시인도 아니고 그의 시는 경박하고 유치하다는 것이다.
왜 김수영은 박인환을 시인도 아니라고 하면서 그의 시를 경멸했을까?
먼저 김수영이 1945년 『예술부락』과 1949년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발표한 「공자의 생활난」을 살펴보겠다.
나는 이미 졸저 『이상 오감도 해석』, 『한국 현대시 해석』에 수록된 시 외에 그 어떤 시도 해석하지 않겠다고 아니, 해석할 능력이 없다고 말씀드린 적 있다. 따라서 나는 「공자의 생활난」을 해석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다만 간단하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감상을 밝히면서 김수영과 박인환의 관계와 김수영의 시 「풀」의 의미를 내 나름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되짚어보려고 한다.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
김 수 영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이태리어(語)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공자의 생활난, 1945년 『예술부락』, 1949년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제목 “공자의 생활난”은 공자적 삶 즉 공자가 추구한 삶의 방식으로는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의미이다.
공자적 삶의 방식이 무엇인가? 그리고 왜 어려운가? 김수영이 본문으로 설명한다.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는 일은 없다. 꽃이 피고 수정되어야 열매가 맺힌다. 따라서 첫 행은 자연의 이치 전도를 의미한다. 즉 자연의 이치마저 뒤집힌 세상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삶이 또는 시가 줄넘기 작난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나는 너에게 감정을 밖으로 드러낸 형상을 요구했으나, 여기서 “형상”은 감정을 밖으로 드러낸 삶이기도 하고 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작전”,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조치나 방법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즉 “작전”은 당시 세상을 지배하거나, 유행하던 삶의 방식 또는 문예사조를 의미한다.
“국수 ― 이태리어(語)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김수영이 공자적 삶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국수”를 “국수” 또는 이태리어로 “마카로니”라는 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국수”의 본질은 “먹기 쉬운” 음식이라는 것이 김수영의 생각이고 이것이 본질이고 공자적 삶이고 이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본질이 반란성이 되는 자연의 이치마저 뒤집힌 어처구니없는 세상이고 어처구니없는 시대라는 깨달음을 김수영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라는 진술로 드러낸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자신의 결심을 밝힌다. “동무”는 사람들 또는 시인들을 의미한다.
“바로 보마”는 결심이고 결단이다. 자연의 이치가 전도된 세상에서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사물의 수량과 한도와/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바로 보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을 보려는 공자적 삶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자연의 이치마저 뒤집힌 세상과 시의 시대에 반란하는 본질을 보는 공자적 삶에, 시에, 목숨 걸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진술로 시를 끝낸다.
이러한 김수영의 세상과 시에 대한 생각과 눈에 박인환은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로 보인 것이다.
놀라운 것은 박인환이 죽은 지 10년이 지난 시점에 이런 직설적인 글을 쓰기 전에 적어도 10번 아니 100번 이상 박인환의 시집을 읽고 또 읽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만한 준비도 없이 이런 직설적인 글을 쓰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박인환의 시를 천 번 만 번 읽어도 칭찬할 시가 단 한 편도 없었다는 것일까.
김수영은 정직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놀라운 점이다. 김수영은 박인환의 시는 단 한 편의 예외도 없이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유치한 것이라고 확신했던 듯하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이하생략
-박인환, 목마와 숙녀, 부분-
특히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언급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원정(園丁)’이 다 뭐냐?” ‘배코니아’가 다 뭣이며 ‘아포롱’이 다 뭐냐?”라고 일갈한다.
이러한 김수영의 직설적 정직함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비판은 김수영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수영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 아니었을 것인데, 박인환에 대한 인간적인 존중 때문에 급소를 피해간 것일까? 아니면 김수영의 한계일까?
김수영의 한계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어령과 이모가 좋아 고모가 좋아, 논쟁에 빨려 들어간 적이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김수영의 정직하고도 아름다운 한계라고 머리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면 박인환을 이처럼 비판한 김수영은 어떤 시를 썼나. 그의 유고작인 “풀”을 살펴보면서 박인환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되짚어보자.
김수영의 유고작인 “풀”은 김수영 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풀은 민주주의다. 그리고 바람은 박정희의 3선 개헌을 포함한 민주주의를 죽여 말살하려는 행위와 세력을 의미한다.
풀이 눕는다는 민주주의가 병들어 눕는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3선 개헌인 동풍을 포함한 민주주의를 죽여 말살하려는 행위와 세력인 바람 때문이다. 그러나 풀인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죽여 말살하려는 세력인 바람이 민주주의를 죽여 말살하기 전에 4.19와 같은 혁명으로 일어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를 김수영은 ‘풀이 먼저 일어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김수영의 세계관이고 신념이다. 따라서 마지막 행,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는
김수영이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마지막 절규다. 박정희의 3선 개헌은 민주주의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이승만의 독재와 3.15부정선거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시도하는 이 순간이 근원인 뿌리마저 병들어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다시 살리기 위해 4.19와 같은 혁명이 일어나야 할 때라고 세상을 향해 소리치며 절규하는 것이다.
시 “풀”은 “공자의 생활난”에서 말한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生理)와/사물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가 바탕이고 동시에 박인환 시에 대한 비판의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보름 전에 “풀”을 완성한 시인 김수영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던 날, 소설가 이병주가 집까지 타고 가라 했던 운전기사가 딸린 외제 차를 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풀”을 읽으면서 나는 박인환 시에 대한 김수영의 비판을 수긍하면서 나 혼자만의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