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허무한 아스팔트 길
종로에서 비에 갇혔다. 굵은 빗방울이 세상을 뒤덮었다. 비는 거세지기만 하고 버스도 지하철도 막차 떠난 지 오래였다. 주머니에는 먼지뿐이었다. 건물 벽에 스며들어 비를 피하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눈을 감았다 떴지만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버스도 지하철도 막차 떠난 지 오래인 장면이었고 빗방울은 지겹게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돈암동까지 가야 하는데
이장희의 ‘불 꺼진 창’이 들려왔다. 나에게만 들리는 속삭임이라고 믿었다. 친절한 이장희. 유행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라는 문장이 저절로 만들어졌다. 순간 지상의 모든 것과 함께 젖어 어둑해지는 발걸음, 신발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다. 가로등은 참 다정하구나. 내가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다 안다는 듯 빗줄기 속에 나를 이끌었다.
악마가 있다면 가로등일지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천사인가? 무슨 이유로 이토록 허무한 아스팔트 길을 밝히고 있는 것이냐!
헛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지. 가로등은 대답도 없이 군데군데 콘크리트에 고인 빗물을 비춰주었다. 웃기네. 발을 높이 들어 발자국 도장을 내리찍었다. 적막이 휘몰아쳐 달려왔다. 차가운 빗물에 식어가는 체온 때문에 몸이 떨릴 뿐이다. 어금니 깨물었다. 세상에 있을지 모르는 낙원이 돈암동 하숙집 한 평 방이라는 듯, 빗줄기 속을 철벅거리면서 걸었던 시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