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하루는 시간이 멈춰있는 것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시계가 움직이지 않는데, 그게 시간이 멈춘 거란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대부분은 시계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나는 시계가 약이 다 되었다는 것에 짜증을 삼키며,
근처에 시계방이 있는 지를 생각했다.
하필이면 망할 회사의 위치가 번화가에서 떨어진지라 한참을 나가야만 보였던 금은방 하나가 생각났다.
요즘 금은방에서는 시계도 봐주나...?
뭐가 되었든지 시계 약을 가는 게 점점 더
번거로워져 가는 요즘이었다.
내가 이런 골머리를 앓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게 요즘은 다들 스마트워치차지. 누가 아날로그시계를 차냐? 그것도 브랜드도 없는 거.'
'맞아, 차라리 좋은 거면 말이라도 안 하지. 롤렉스
이런 거는 인정.'
내 시계는 오만 원짜리였다. 중고제품을 싸게 파는
오픈마켓을 우연히 들렸다가 발견한 내 보물.
음... 보물 치고는 좀 막 다루는 면이 있으니까,
좀 하찮은 보물.
뭐, 아무리 하찮아도 보물은 보물이고,
나는 시계 없으면 불편해서 못 사는 사람이었다.
핸드폰은 핸드폰이고, 시계는 시계니까.
귀찮아도 오늘은 금은방 좀 찾아보겠다고,
더 정확히는 시계방 좀 찾아보겠다고 다짐했다.
조금이라도 일찍, 칼퇴 비슷한 거라도 하려면
시간 안에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하나하나 업무를 쳐내며, 문득 시계를 봤다.
시계는 여전히 오전 10시에 멈추어 있었다.
아, 맞다. 내 시계 지금 죽었지.
핸드폰을 꺼냈다.
"어?"
화면 속의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음? 내가 시간을 잘못 봤었나 싶었다.
시계가 어제저녁 10시부터 죽어있었던지,
아니면 약발이 완전 다 된 건 아니라 조금 움직인 건지.
아침부터 정신없이 일을 하느라고 정확히 어쨌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 아무렴 어때. 아직 열 시밖에 안 되었다니,
오늘 좀 순조로운데? 이대로만 가자!
다짐하는 순간 바뀐 핸드폰의 시간. 10시 1분.
그리고선 이상하리만치 확 체감이 되는 소음.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는, 시계가 살아 움직이는...
시간이 살아 움직이는 역동의 소리.
습관적으로 쳐다본 시계의 분침이 10시를 미묘하게
벗어나 있었다.
10시 1분...
기묘한 경험이었으나, 정신없이 몰려오는 일감을
처리하면서는 금방 잊어버렸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계 약을 가는 데는 실패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시계방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계 좀 본다는 금은방의 주인이
이 시계는 약으로 가는 시계가 아니라고 해서 그랬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시계는 약으로 가는 시계가 아니라
오토메틱 시계로 보인다고 말이다.
그에 걸맞게 시계의 시간은 인식한 이후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대로 가고 있었다.
'이런 오토메틱 시계는 처음 보는데,
얼마나 주고 사셨어요?'
'한 오만 원 할 거예요.'
'예에? 그런 취급받을만한 시계는 아닌 거 같은데.... 엄청 오래되어 보이는데, 관리가 진짜 잘 돼있어요.
구조도 특이하고.'
'그런가요?'
'많이 아껴주세요. 좋은 물건은 마땅히 그 대접을
받아야죠.'
새삼스러웠다.
시계는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내 마음에
쏙 들어있는 상태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샤워할 때를 제외하곤
거의 뺀 적이 없었다.
그냥 가볍게 세수하고 양치하는 정도에선
계속 차고 있었다. 물이 좀 튀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유 없이 그냥... 이 시계가 좋았다.
시계의 디자인 자체는 특별한 게 없다. 흔한 디자인.
검고 굵은 정자체로 적힌 숫자,
사이사이 시간을 알 수 있도록 그어진 눈금표시.
이런 디자인은 많았다.
나도 제법 써봤고 지금도 서랍 어딘가에 굴러다니는
그런 시계가 한두 개는 있을 것이었다.
추구하는 스타일이 시계는 시계다워야 한 다이다 보니, 눈이 가는 시계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비싸고 좋은 시계보다 내 눈에 깔끔하고 예쁘다면
저렴해도 구매했고, 만족스럽게 차고 다녔다.
거기에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는 중요치 않았다.
물론 사람들은 내 시계가 바뀌는지도 바뀌었는지도
몰랐다.
"아- 피곤하다."
한 번 하품을 하니, 끊이지가 않았다.
직장인의 대다수가 다 그렇겠지만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취할 수 있는 휴식이란 너무 적었다.
더욱이나 주중에는 와서 씻고 자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루틴 외의 이벤트에 사용한 시간과 에너지는
가여운 직장인의 방전을 유도한다.
생각지도 못한 소득으로 정신적 소모도가
어느 정도 만회된다고 하더라도
육체적 피로도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자각하니 더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이
오늘은 겨우 화요일이었다.
지금부터 자도 겨우 5시간만 잘 수 있었다.
토요일까지 버텨야 하는 길이 암담했다.
"늘어지게 자고 싶다."
아까 체감하던 10시처럼. 정말로 시간이 더디게 가서
10시간 같은 5시간을 잤으면 좋겠다.
말도 안 되는 소원을 빌며, 순식간에 수마에 젖었다.
-
아침인가? 아직 아닌가?
피곤에 가라앉은 몸뚱이가 간신히
기상 비슷한 것을 했다.
깜깜한 방 안에 오싹한 전율이 스쳤다.
내가 핸드폰 충전은 하고 잤던가?
순간 번쩍 뜬 눈과 각성된 손으로 핸드폰을 더듬었다.
제발, 제발...!
기계적인 손놀림이 핸드폰의 화면을 켜기까지
마음속으로 몇십 번의 기도를 올렸다.
4시 15분.
다행스럽게도 기도가 통한 모양이다.
옆에 붙은 AM표시까지 보고 나니 짧은 각성 후
진한 탈력감이 밀려왔다.
"휴..."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샜다.
아직 알람이 울리기까지 대략 15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있다는 건 싫었지만
실상은 이 정도도 감지덕지였다.
좀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핸드폰을 충전하며,
알람이 제대로 맞춰져 있는지 확인까지 했다.
내게 생긴 15분의 시간을 알차게
수면으로 보낼 예정이었다.
잠은 몰려갔던 것이 거짓인 것처럼 순식간에 찾아온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15분의 휴식을 취한 것치곤 제법 체감 시간이 길었다.
풀린 피로도 역시 그렇다.
흠칫해 눈을 뜨고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찾았다.
더듬거리던 왼손에 시계의 무게가
존재감을 드리운다.
4시 15분. 갑작스러운 불빛에 한껏 찡그린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옆에 붙은 AM까지 변한 것이 없이,
아까 전 기억과 똑같았다.
"?????"
뭐지? 손목의 시계를 비춰도 4시 15분이다.
태블릿의 시계를 보아도 4시 15분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야 모르지?
근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잠잘 시간 15분! 개이득. 개꿀!!
피로가 풀려봤자 피로다.
어차피 피곤하니 관건은 이 피로라는 짐덩이를
조금이라도 줄여 회사로 가는 것이었다.
이 독의 해독제로 잠만 한 것이 없었다.
다시금 눈을 감았다.
이 모든 행동에 걸린 시간이 채 1분을 넘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본 시간 역시
4시 15분이었으니까.
-
음...? 이건.........
차마 생각으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온몸으로
나의 엿 됨이 느껴졌다.
몸이 너무너무 개운하다......
아까처럼 내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15분으로 누린 호사라기엔
말이 안 되는 개운함이었다.
어떻게 해......
눈을 뜰 자신도 없었다.
슬프게도 현대인의 신체에 찾아오는 개운함이란
쉬는 날을 제외하곤 재앙이었다.
대지각의 확정이기 때문이다.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스피드!
눈을 떴다.
별다른 의도도 하지 않았는데도 번쩍 떠졌다.
에너지가 풀충전 되었다는 소리였다....
망할 핸드폰. 알람 분명 맞춰놨는데, 왜 안 울린 거야?!
설상가상으로 사방이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내가 이래서 늦잠을 잤구나......
묘하게 납득이 되면서도 치미는 짜증이,
04:15 AM.
짜증이..........?
"??????????"
손목의 시계도 여전히 4:15, 태블릿의 시간도 4:15,
노트북의 시간도 4:15.
핸드폰의 시간도 여전히 4:15.
체감 상 2분은 지났음이 분명함에도 여전히 4:15.
홀린 듯이 방을 나섰다.
1.5 룸 거실엔 암막커튼이 쳐져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커튼을 걷어보았다.
13층. 제법 고층의 오피스텔 아래로
펼쳐진 풍경은 밤이었다.
새벽이었다.
이 적요의 색은 분명히 새벽 4시의 것이었다.
동시에 느껴지는 이 기묘한 정적.
어제 아침에 유난하게 느꼈던
생명의 시간이 움직이는 소리.
믿기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정말로 믿기지 않게도 시간이 멈춘 것이다.
정말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을.
시간이 멈추었다는 사실을.
-
내게 주어진 사실이란 왼손의 묵직함.
그 존재감이 나타내는 시간 4:15.
모든 것이 멈추어 버려 찾아온 시간의, 생명의 적막.
그 고요함이 만들어낸 평온함.
충만해지는 나의 평안.
온전히 만끽해 보는 여유.
시간에 쫓기지 않는 삶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이 여유였다.
또 하나는 별로 알고 싶지 않던 진실이었는데,
내가 강제적으로 정지된 저것들을
건드리는 순간에 내게 주어진 이 기적의 순간이
끝나버릴 것이란 사실이었다. 그냥 알 수 있었다.
자, 이제 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순간을 계속 누릴 것이냐,
나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냐에 대해서.
만족스레 풀린 피로, 오랜만에 맞보는 평화로움.
아니다,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적의 여유.
그러나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숨을 멈춘 이 순간은,
그 적요한 평화가 지나치게 외로움을 선사했다.
당연하지.
인간이란 애초에 혼자서만 살 수는 없는 존재이니까.
나 역시 그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면,
그래서 주어지는 생리의 흐름 속에서 사는 것이
당연한 이치니까.
거기에서 벗어난 나는 지독한 해방감과 외로움을
느끼고 말았다.
그래, 처음부터 내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오랜만에 정말로 원 없이 잤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해."
그러니 다시 힘내서 내게 주어진 현실을
살아갈 수 있어.
오늘의 나는 15분 일찍 하루를 시작할래,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게!
내 다짐이 끝나기 무섭게 미동도 없이 고요하던
손목의 시계가 소리를 낸다.
째깍째깍째깍.
그리고 마침내,
4시 16분.
기다리던 시간을 맞음과 동시에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있던 것들이 그 막힌 숨을 시원하게 토해내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움직이는 소리. 생명이 살아가는 소리.
내가 어우러져야 하는 소리.
내 하찮은 보물은 여전히 내 손목 위에서
나와 함께하고 있다.
"고마워."
내게 도래했던 기적의 순간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 길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내 시계에게 고마웠다.
그 미지의 순간에서 현실의 세계로 도달하기까지
나와 함께한 것은, 내게 그 순간을 알려준 것은
이 시계의 작은 초침소리였으니까.
'많이 아껴주세요. 좋은 물건은 마땅히 그 대접을
받아야죠.'
정말로 맞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