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서 나의 몸은 조금 편해졌고, 마음은 매일같이 몸살을 앓았다. 대화가 되니 밤낮으로 종알거리는 모습이 주물러 터뜨리고 싶게 예쁘다가, 사소한 자극에도 원인 모를 떼를 부릴 때는 내 속에 이 정도의 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솟는다. 그래서 언성을 높이거나 냉정하게 모른 척하고 나면 어김없이 미안해지고 자책이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패턴을 반복하다 보니, 말을 잘 들어줄 때도 완전히 안심이 되지 않고 단호하게 훈계를 해야 하는 순간에도 다가올 후회를 알기에 주춤하게 된다. 매 순간 그 지점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들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 엄청난 피로감을 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 피로감의 원인을 아이에게서 찾는 것은 더 큰 죄책감을 갖게 하므로 끝도 없이 나를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그 또한 나의 마음을 갉아먹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후 5시 55분.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리자 부지런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기필코 6시 정각에 출입 게이트를 뚫고 나가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에 도달할 것이다. 시내 한복판에서 집까지, 막히는 모든 도로들을 연결해 놓은 퇴근길을 최대한 빨리 통과하여 아이의 하원 시간에 맞춰 도착할 것이다. 마치 집에서 아이를 하루 종일 그리워하고 기다렸던 듯 여유 있는 모습으로 유치원 차량에서 내리는 아이를 맞이할 것이다. 이 사소한 행위 하나로 "나는 왜 맨날 할머니가 데리러 나와?"라 했던 아이의 불만을 조금이라도 해소시켜 주려 했던 것이 오늘의 계획이었다. 한 번씩 떼를 쓸 때마다 그날의 이벤트 자체에 집중해서 답을 찾아보려 노력하던 중,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근본적인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하나의 원인으로 수렴하는 불만을 그날그날 다른 자극과 연결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방향으로 생각이 발전되자 더 큰 불안이 찾아왔다. 그 작은 마음에 본인 스스로 치유하지 못할 '상처'를 남긴 거라면, 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오붓하게 둘만의 데이트를 하며 눈을 마주하고 물어봐야 했다.
"아가. 엄마한테 화난 거 있어? 엄마가 무얼 해 주면 마음이 나아질까?"
모처럼 칼퇴 작전에 성공한 나를 작정하고 약 올리듯 도로는 작은 틈도 없이 막혀있었다. 추돌 사고까지 보태져 더욱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시각, 아이는 결국 할머니 손을 잡고 집에 도착했다. 심지어 유독 피곤한 하루였는지 소파에 앉히자마자 잠이 들어 버렸다 했다. 늦어버린 미안함도 잠시, 이후 펼쳐질 전쟁이 눈 앞에 그려져 가슴이 답답했다. 저녁 시간에 푹 재워보았자 늦은 밤 일어나 새벽까지 다시 잠들 수 없을 것이고, 아침에는 잠이 깨지 않아 투정을 부리고 결국 시간에 쫓겨 억지로 데리고 나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또 지독한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깨우자니 당장 펼쳐질 악몽도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아이의 손만 조심스럽게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아이가 눈을 번쩍 떴다. 예고 없는 기상에 평온한 전개를 바로 포기해 버린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엄마 왔어, 아들" 하고 말을 건넸다. 분명 눈썹을 조금씩 찌푸리며 서서히 울음을 터뜨려야 하는데 아이는 그저 멍한 눈빛으로 나를 한번, 창 밖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천사 같은 미소까지 지어주며 다섯 살이 흉내 내는 세 살 아이의 말투로 "왜 아직 밝은데 엄마가 왔지?"라고 말했다. 작은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나에게는 어떤 창조물보다 아름다운 우리 아가의 새하얀 알굴에 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내려앉아 현실감 이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으로 눈에 담겼다. '아직 그리 복잡하게 얽혀 있지도 않을 너의 마음을 나는 왜 풀지 못했을까. 앞으로 너와 함께하며 얼마나 많은 오판과 실수를 저지를 것이며, 그때마다 온갖 이론적인 방법들을 뒤적이며 점점 더 너와의 거리를 만드는 바보짓을 해댈까.' 울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막힌 도로 위에서 미련을 버렸던 '오붓한 둘만의 데이트'는 거짓말처럼 실현되었다. 차분하게 따라나선 아이는 저녁 메뉴를 고르는 것부터 놀이터를 거쳐 집으로 돌와와 씻고 잠드는 모든 과정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이고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잠들기 전 나란히 누워 "오늘 재미있었어?라고 물으니 "응, 내일 아침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게!"라고 목청껏 외친다. (일사불란은 발음하는 것이 재미있다며 최근 따라 하기 시작한 말이다ㅡㅡ;)
아이가 잠들고 한참을 생각해 보아도 오늘 우리 모자가 함께한 풍경에는 조금의 특별함도 없었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매일같이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모습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시간 끝에 생색이라도 내 듯 아이의 소감을 물었던 나는 한심했고, 이 작은 만족감을 얻고 과분한 애정을 돌려주는 아이는 고맙고 안쓰러웠다. 조금은 답을 찾은 듯하다가 이내 더 두려워지기도 했다. 알게 된 것을 앞으로 잘 행할 수 있을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아가. 내일이 되면 또다시 실수투성이가 되겠지만, 오늘의 나는 쌀알만큼이라도 너의 마음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너를 곁에 둔 기적 같은 행운을 다시 한번 되새겼어. 너에게 '엄마'라 불리기에 나는 영원히 부족할 것이고 미련할 것이고, 그래서 늘 뒤늦은 후회만 하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노력을 멈추진 않을게. 무엇이든 해결해 주는 든든한 엄마가 되진 못해도 매 순간 너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일게.
우리 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