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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yo Jun 13. 2021

주말에 뭐 해 먹을까?

주말 아침은 보통 빵과 토핑을 바꿔가며 간단한 피자빵(?)을 만들어 먹는데 이번 주말에는 좀 더 맛과 멋을 낸 요리를 하고 싶었다. 일단 비주얼에 가장 자신 있는 갈레트(#정통아님주의)를 선택하고, 도우는 최대한 담백하고 고소하게 메밀 반죽을 쓰기로 했다. 도우가 양보한 화려한 맛과 식감을 토핑이 채워줘야 하니 짠맛을 걷어내지 않은 베이컨과 허브와 소금으로 밑간을 한 양송이, 어떤 재료와도 잘 어우러지는 양파를 충분히 올려주었다. 모양새로는 정 가운데 달걀을 한알만 올려야 제격일 테지만 대식가 남편과 아들에게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 마음을 살짝 접고 두 알을 떨어트렸다. 몇 가지 치즈를 섞어 녹여내고 삶은 토마토와 루꼴라를 얹으니 그럴듯한 브런치가 완성되었다. 신나서 달려오는 두 남자를 잠시 저지시키고 재빨리 사진 한 컷을 남겼다. 마음이 급해 내민 아이의 손이 같이 나왔어도 좋았으련만 웬일인지 아이마저 참을성을 갖고 기다려주었다. 어여쁜 생김새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깝지 않을 만큼 먹성 좋은 두 남자는 차려낸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었다.


"이 맛에 내가 요리하지." 했지만 사실 요리의 힐링 효과는 다양하다. 물론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은 한 입 맛본 후 아이의 엄지 손가락이 척 하고 올라갈 때이다. 아이는 이유식을 시작한 이후 단 한 종류의 음식도 거부해 본 적이 없는 먹보이지만 나름 음식의 맛과 향을 정교하게 음미하고 서툰 표현일지라도 평가하는 것을 좋아한다. 작은 입이 꽉 차도록 크게 한 입을 베어 물고 좌우로 눈을 굴리며 오물오물 씹어보고 꿀꺽 넘기기가 무섭게 흡족한 미소와 함께 엄지 손가락을 들어줄 때, 말해 뭐 할까. 별로 비범할 것도 없는 재주가 이보다 더 뿌듯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그릇을 싹 비운 후 "엄마 내일 또 만들어줘도 될까?"라는 말까지 해줄 때면 백 그릇이라도 해다 바칠 에너지가 샘솟는다. 매일 밤을 헤매며 일하는 딸이 주말 여섯 끼를 꼬박 차려내는 것이 못내 안타까운 엄마는 "몸 좀 혹사시키지 말고 나가서 사 먹고 그래라." 하시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자극시키는 성취감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바쁘다. "엄마. 요놈이 취나물이며 도라지며 그 질긴 나물까지도 악착같이 씹어가며 먹어줄 때 기분이 얼마나 째지는지 알아? 그 시간에 누워 잔다 한들 그만큼의 피로 해소가 안된다니까."


요리가 가진 또 하나의 힐링 기능은 안구와 뇌의 정화를 돕는다는 것이다.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아름답지 못한 행각들과 곪아 터진 상처들을 목격하게 된다. 어떤 형태의 공동체든 가질 수밖에 없는 속성인 듯하여 누군가의 잘못으로 몰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그저 조직의 생리가 그러하다 생각하면 이런 곳에서의 삶을 십여 년은 더 버텨내야 한다는 것에 숨이 조여오기도 한다. 쉽게 말해 이런저런 더러운 꼴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되는데,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이 커진다. 어떤 불쾌한 의도나 꺼림칙한 목적도 담기지 않은 투명하고 담백한 것. 한 꺼풀 벗겨내고 들여다볼 필요 없이 아름답다는 첫인상으로 시작하여 아름다웠다는 기억만으로 남는 것. 그럴듯한 요리는 아름다움을 눈에 담고 맛보고 싶은 직장인들에게 분명 '치유'의 작용을 한다. '나를 위한 선물'이라는 명분으로 Fine Dining을 찾는 직장인들도 눈과 혀의 보상이 필요해서 비싼 값을 서슴지 않고 치르는 게 아닐까. 그래서 먹어주는 멤버가 늘 같은 상차림일지라도 매번 곱고 화려하게 차려내고 싶다. 플레이트 위에서 요리조리 움직여 보는 손이 즐겁고 색과 모양이 조화롭게 자리 잡은 순간의 짜릿함이 꽤 크다. 먹어 줄 이들의 기대에 찬 표정까지 겹쳐지면 그만한 아름다운 광경이 또 없다.


마지막 기능은 다분히 개인적인 것인데, 요리를 하는 시간 동안 내가 가진 끼(?)를 소심하게 부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유난히 내성적이었고 타인의 행동이나 말에 대한 반응이 명쾌하지 않은 무심한 아이였다. 속까지 편했다면 마냥 행복했을 텐데 드러나는 무심함과는 다르게 머릿속에는 늘 수많은 생각들이 들어 차 있었다. 그런 나에게 그림은 완벽한 표현과 소통의 창구였다. 말로 내뱉어 깎아내리고 싶지 않은 귀한 감정들을 그림이라는 지극히 은유적인 세상에서 마음껏 표출할 수 있었다. 가끔 교수님들에게 평가를 받다 보면 내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부풀려 해석을 해 주실 때가 있는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나의 그림이 타인의 생각을 열고 확장시켰다는 쾌감이 있었다. 온전히 나의 결정에 의해 그림으로 채워진 13년의 세월을 묻고 새로운 길을 택했을 때, 가장 오래 남은 아쉬움이 있다면 표현의 창구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될 수도, 매 순간 예민하게 느껴지는 감정에 둔해지고 느닷없이 발동이 걸리는 상상을 멈출 수도 없었던 내게 그저 드러낼 방법만 사라진 셈이었다. 그 갈증이 영 가시질 않아 IT 일을 하면서도 남모를 시도들을 해왔다. IT 컨설팅을 하다 보면 보고서 쓸 일이 끊이질 않는데 '조금 달라 보이는 보고서'는 고객의 마음을 끄는 데 있어 기대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저 유려한 보고서에 그치지 않기 위해 전략을 수립하고 과제를 기획하는 과정에도 나름의 창의력을 발휘해 보니 결과의 차이가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머리의 어느 한쪽 구석에서 생산되는 아이디어와 열정이 쓰임새를 찾지 못한 채 폐기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 자신과 타인에게 심미적인 만족감을 주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은 욕구였다.

요리가 그 욕구를 전적으로 충족시켜 주진 않지만, 창작과 무관한 영역의 일을 하며 동시에 가족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주부의 역할을 가진 나에게는 새롭고 아름다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최적의 취미이다.


'주말에 뭐 해 먹을까?'가 낙이 되는 일상.

오늘도 정성스레 차린 삼시 세 끼로 일주일의 고단함을 날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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