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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Dec 16. 2022

명품보다, 하와이보다 행복합니다…꼭 느껴보세요.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누군가 요즘 주로 뭘 하며 지내냐고 묻는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산책이요” 라고 답하겠다. 나는 18~19세기를 살았던 제인 오스틴, 또는 그녀의 책에 나오는 여성들처럼 살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시대는 200~250년이나 전이지만 일상에 엄청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 차가 없다. 매일 나갈 직장이 없다. TV 등 오락거리가 없다(TV는 샀지만 이용료가 너무 비싸 채널을 신청하지 않았다). 친한 사람들을 언제든 볼 수 없다(나는 연수 때문에, 옛날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서). 하루 종일 집안에 있기엔 답답하다. 집 근처에 아름다운 산책로가 있다.


자, 이러면 누구라도 종종 산책에 나설 수밖에 없다. 내가 사는 노스캐롤라이나는 녹지가 많은 지역이다. 곳곳에 작든 크든 공원이나 트레일이 잘 조성돼 있다. 집을 지은 뒤 주민을 위해 녹지를 만든 게 아니라, 녹지 근처에 집을 짓고 사는 느낌이다.      


한국처럼 가볍게 오를 동네 뒷산이나 도심 속 가까이에 북한산·관악산·도봉산 등 좋은 산이 있는 건 아니지만, 대신 군데군데 공원과 산책로가 많이 있다.


이런 산책로는 대부분 큰 오르막 없이 평지에 가깝지만 걷는 데 걸리는 시간만 보면 가벼운 등산을 대체할 만큼 규모가 큰 게 특징이다. 자연 그대로인 흙길도 있고 하얀 아스팔트로 잘 닦아 놓은 곳도 많다. 후자의 경우 나이가 많거나 몸이 좀 불편한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 몇 달 전 남쪽 플로리다부터 북상한 허리케인이 이곳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도 이 ‘아스팔트 트레일’은 말끔해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숨이 턱턱 차는 등산을 싫어하는 사람도 산책은 좋아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의 트레일이 딱 그런 길이다.             


걷는 걸 좋아해도 한국에선 아침부터 밤까지 직장에 메여 있다 보면 시간이 잘 나지 않았다. 게다가 20년 가까이 매일 차를 몰고 다니는 게 버릇이 됐다. 마음먹고 산에 가지 않는 한 충분히 걸을 곳도 없고, 무엇보다 공기! 공기! 공기! 미세먼지로 공기질이 안 좋은 날이 너무 많다. 공기가 괜찮아 동네 한 바퀴 돌려해도 찻길과 닿아있는 경우가 많아 운동은 될지 몰라도 ‘힐링’과는 거리가 멀었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미국인들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플라스틱과 일회용품을 이렇게 많이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사는데도 공기는 늘 ‘좋음’ ‘매우좋음’이다. 캘리포니아 같은 곳은 바로 옆에 항구가 있고(배에 쓰이는 기름은 저급한 기름으로 공기오염의 주범 중 하나다) 산불이 많이 나 공기가 안 좋다고 해도 한국에 비하면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수준이다.

특히 노스캐롤라이나는 말 그대로 공기는 그냥 잊고 살 정도로 매일 좋고, 자연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비록 몇 개월 뒤 나도 돌아가겠지만, 매 순간 눈부신 하늘을 보고 맑은 공기를 들이쉴 때면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지인들에게 ‘나 혼자 이렇게 좋은 공기를 마셔서 미안해’란 생각에 슬퍼질 정도다.      


아무튼 나는 그래서 미국에 온 뒤 거의 매일 짧게라도 이곳저곳 산책로를 걷게 됐다. 그랜드캐년이나 요세미티 국립공원같이 엄청난 대자연은 아니지만, 한국에 비하면 굉장히 크다. 처음엔 하늘 끝까지 솟아있는 키 큰 나무들과 이름 모를 새소리, 바로 옆을 흐르는 개울(강이었다)의 잔잔한 물소리, 눈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으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직장도 좋고 일도 좋고 치열하게 사는 것도 좋고 성공과 부를 위에 치달아 목표를 이뤄내는 것도 좋다. 하지만 사람은 원래 이렇게…자연 속에서 에너지를 얻고, 그 안에서 숨쉬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온몸과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단 돈 1원, 1달러도 들이지 않았는데 고요한 산책로를 걸으며 이렇게 큰 행복과 안도를 느낄 수 있다니 신기하고 뭉클했다.      


나는 혼자 살아서 해가 저물면 무서운지라 주로 낮에 산책한다. 지금은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서 휴가인 사람들이 많지만, 평소에도 낮시간엔 일하느라 당연히 산책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1시간 동안 만나는 사람이 몇 안 될 정도로 혼자 걸을 때가 많았다.


혼자 유유히 자연으로 둘러싸인 길을 걷다 보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냥 생각들이 조용히 밀려와 떠오른다. 신기하게도 그 생각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면 성공하지?’ ‘재테크를 어떻게 할까?’ ‘돌아가면 어느 부서에 가서 일할까?’ 이런 것들이 아니다.     


내가 가진 소소한 것들에 대한 감사,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 그동안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대한 고마움, 사람이 산다는 건 무엇일까, 스스로 행복하고 만족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이런 생각이 주로 든다. 아직 못 가봤지만 버스를 갈아타고 조금 멀리 가면 ‘시인의 산책로(Poet’s Walk)’란 이름의 트레일이 있는데, 과연 역사적으로도 많은 문인이나 철학자, 예술가들이 산책을 즐겼다는 게 조금은 이해가 간다.     

누군가는 뜬구름 잡는 소리 한다, 역시 여자라서 감상적이다, 투지가 없다, 혀를 찰 수도 있다(요즘 한국은 워낙 이런 분위기니까). 하지만 나에겐 산책로를 걸을 때 만나게 된 감정들, 독기와 독소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순수한 느낌, 인간이 특별한 존재인 동시에 자연의 일부라는 어렴풋한 진실들, 그 많은 것들이 너무나 소중하다.

미국에 함께 연수 온 사람들이나, 한국에 있는 친한 사람들은 이런 나의 생활을 전하면 “니가 차를 안 사니까 계속 산책이나 하고 있는 거 아냐. 언제까지 아까운 시간을 그렇게 허비할 건데. 차 끌고 여기저기 여행 다녀야 할 거 아냐?”라고 안타까워한다. 맞는 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제인처럼 나도 차가 없어  ‘외출=산책’이 된 면이 크다. 하지만 그 덕에 평생 처음 맛보는 너무나 큰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유명한 김창옥 강사의 말 중에 와닿았던 말이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사람은 몸과 마음이 같은 곳에 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아무리 유명한 여행지에 가고, 좋은 걸 접해도 내가 불편하고 힘들고 뭔가 나와 맞지 않아 마음이 그곳에 집중되지 않고 오롯이 즐길 수 없다면, 그게 결코 100% 행복한 건 아니라는 거다. 정말 공감한다. 내가 1년간 미국 연수 기회를 얻었다고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란 결기로 유명한 관광지를 쉴 새 없이 다니고, 남들이 한다는 건 다 해야 한다며 노스캐롤라이나(남한보다 면적이 넓다) 곳곳을 의무감(?)에 누비고 다닌 다면 행복할까? 누구에겐 분명 행복했을 거다. 하지만 일과 사람…심지어 매일 눈뜨는 것조차 버거웠던 나에겐 그런 ‘도장깨기’보다, 명품을 사서 소유하는 것보다, 어쩌면 이런 산책이 더 맞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 나는 산책할 때 몸과 마음이 오롯이 함께 있고 행복한 기분을 느낀다.

     

인간은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섬세한 감정을 지닌 동물이다. 결코 자연과 떨어져 건강하고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나이가 되면 신체 능력은 떨어지고, 아무리 건강해도 80~100년 전체를 성공과 부, 인기와 관심 속에 살 수는 없다. 우리에겐 결국 우리를 받아줄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자연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연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환경을 보호하자, 결국 인간은 죽는다, 그런 주장이 아니라 자연과 소통할 여유와 통로를 남겨둘 때 우리는 좀 더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우리 안에 새겨진 행복의 DNA를 작동시키며 살 수 있다는 거다.      


산책.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이 가장 편하고 가장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행동이자, 언제든 큰 노력 없이 자연과 나, 사람들과 나의 관계, 무엇보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통로다. 요즘엔 긴 글을 쓰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고들 한다. 사람들이 ‘숏폼’같이 짧은 영상이나 짧게 요약한 글에 매우 익숙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어 준 사람들을 위해 훌륭한 사람들이 산책에 대해 남긴 말을 적어본다.      

“To sit in the shade on a fine day, and look upon verdure, is the most perfect refreshment.” (날씨 좋은 날 그늘에 앉아 푸르름을 바라보는 것은 가장 완벽한 기분 전환이다) -제인 오스틴     


“What a joy it is to feel the soft, springy earth under my feet, to follow grassy roads that lead to ferny brooks where I can bathe my fingers in a cataract of rippling notes.” (발밑으로 부드럽게 봄기운이 도는 대지를 느끼고, 고사리 피며 이어지는 풀밭 길을 따라가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헬렌 켈러     


“Smile, breathe and go slowly.” (웃고, 숨 쉬며, 천천히 가세요) -틱낫한     


“If a person walks in the woods and listens carefully, he can learn more than what is in books.” (사람이 숲 속을 걷고 주의 깊게 듣는다면, 책에서 배우는 것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조지 워싱턴 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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