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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Dec 26. 2022

크리스마스에 제일 생각나는 게 그 녀석이라니.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한 해의 끝자락. 미국에서 맞는 크리스마스. 연수기간이 1년이니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거리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차도 거의 없다. 미국 최대 명절이니 만큼, 나라 전체가 일제히 휴가에 돌입했고 멀리 사는 가족을 보러 떠난 사람, 해외로 여행 간 사람도 많다. 게다가 올해는 역대급 한파가 닥쳐 더더욱 집 밖은 조용하다. 창 너머로 가끔 바람소리인지 도로를 빠르게 지나가는 차 소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윙윙거림이 들려온다.


그리고 싱글인 나는 당연히…‘나홀로 크리스마스’다. 무엇보다 감기에 걸려버렸다. 어차피 같이 성탄을 보낼 사람도 없지만, 감기까지 걸리고 밖은 얼어붙었으니 이래저래 집콕하며 보낼 수밖에 없다. (날씨 좋고 건강하면서 집에만 있는 것보다 차라리 잘 된 거 아냐?)  

   

이 적막함 속에서 감기약을 삼키고 코를 풀면서 그 녀석을 떠올린다. 부산스럽기 그지없고 천방지축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놈. 제 몸집에 비해 몇 배나 큰 소리를 내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놈. 식탐이 많은 놈. 무엇보다 미국에 오자마자 나 같은 여자를 폭행한 놈.

     

바로 람쥐 람쥐 다람쥐다. 미국에서 다람쥐는 한국의 비둘기만큼 흔하다. 약간의 잔디, 풀숲만 있어도 어김없이 다람쥐가 뛰어다닌다. 대신 갈색에 검은 줄무늬가 앙증맞은 한국 다람쥐와는 다르게 몸 전체가 회색이고 꼬리가 청소할 때 쓰는 긴 솔처럼 풍성한데, 빛을 받으면 묘한 은청색으로 예쁘게 빛나기도 한다.

사실 이 회색 다람쥐가 다람쥐냐, 청설모냐를 두고 지인과 심각하게(?) 토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우리가 다람쥐를 영어로 squirrel 이라고만 배워서 더 헷갈리게 된 것 같다. 찾아보니 한국에 사는 줄무늬가 있는 다람쥐는 영어로 squirrel이 아니라 chipmunk라고 한다. squirrel은 원래 뜻이 청설모다. (처음에 영어 번역기에 ‘청솔모’라고 쳤다가 ‘clean hat’이란 말이 나와 당황했다는 건 비밀)


미국의 회색 다람쥐는 정확히는 ‘동부회색청서’로 청설모의 일종이다. 당연히 사람들도 squirrel(청설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 같이 ‘다람쥐=squirrel’로 외운 사람은 미국 사람이 squirrel이라고 확인해 주니까 ‘거봐. 청설모가 아니라 다람쥐 맞네’라고 해버리는 거다. 뭐 어차피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느냐만은.  

   

어쨌든 이 회색 다람쥐는 한눈에 봐도 한국 다람쥐보다 몸집이 큰데 자세히 보면 근육이 느껴질 정도로 가슴과 다리 등이 탄탄하다. 처음에 미국에 와서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산책로를 걷다가 사방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너무나 뚜렷하게 들려 깜짝 놀라곤 했다. 분명 사람이 없는데 무언가 묵직한 생명체가 움직이는 소리가 바로 가까이서 들리니 말이다. 알고보니 다람쥐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내는 소리였다.


이 소리는 가을이 깊어지며 나뭇잎들이 마르면 더욱 크게 들리는데 고요한 산책로를 둘러싼 녹지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버스럭 버스럭 북적북적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그래 이곳의 주인은 너희로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햇볕을 받은 낙엽들이 잘 구워진 빵껍질처럼 매끈하다. 다람쥐들이 이 낙옆을 누비고 다니면 한바탕 난리법석이 난다.

한국 비둘기들이 사람은커녕 오토바이가 지나가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처럼 회색 다람쥐들도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워낙 오랜 세월 사람과 섞여 살아서 그런 것 같다. 심지어 산책로 바로 한가운데까지 진출했다가 내가 ‘어쭈’하며 걸음 속도를 높이면 못 이기는 척 잠깐 잔디 쪽으로 비껴 섰다가 바로 다시 돌아오는 놈들도 봤다.     


폭행당했단 건 거짓말이 아니다. 하루는 산책로를 걷는데 머리에 퍽 하고 뭔가가 떨어져서 정말이지 통증을 느낄 정도로 아팠다. 내 머리를 강타한 건 도토리였는데 아무리 크기가 작아도 위치에너지에 따라 높은 곳에서 바로 떨어진 걸 맞으면 꽤 아프단 말이다. 갑자기 뭔가가 떨어지니 놀라기도 놀랐는데, 범인은 바로 이 다람쥐였다. 나무타기 고수인 이것들이 도토리를 내 머리 위로 던진 거다.


언젠가 북한산 둘레길을 걸을 때 아버지가 다람쥐들이 도토리 껍질을 쉽게 까려고 사람(또는 큰 동물)이 밟을 수 있게 길에 떨어뜨린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이라면 꽤 영리하다. 머리에 정통으로 맞은 건 한 번뿐이지만 다람쥐들이 던진 도토리가 내 바로 옆에 툭! 퍽! 떨어져 놀란 건 여러 번이다. 다시 생각해도 고연 놈들이다. 그래도 난 너그럽게 도토리를 고이 즈려밟고 지나가 주려 노력하긴 했다.      


한 번은 한 산책로에서 이어진 또 다른 산책로로 들어서려는데 ‘Lost Cat’, 그러니까 고양이를 잃어버렸으니 찾아달라는 전단지가 고양이 사진과 함께 붙어있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다시 길을 가는데 어디선가 희한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새된 음정에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그런 울음이었다. 한글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끄아악 끄아악’ ‘까아악 까아악’…. 마침 해가 조금씩 지고 주변에 사람도 없어 그 소리가 계속 들리니까 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순간 ‘아, 그 잃어버린 고양이가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숲 속에 고립돼서 지치고 힘들어서 저런 소리로 살려달라고 우는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집중해서 들어봐도 보통의 고양이 소리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극도의 척박한 환경에 건강이 안 좋아졌다면 저런 소리가 날 수도 있겠다 싶어 소리를 따라 구하러 가야 하나, 어째야 하나 나름 고민이 됐다. (사람이 혼자 오래 있다 보면 상상력이 좋아지는 것 같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얼마 정도 걷다가 드디어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과 딱 맞닥뜨렸다. 바로 회색 다람쥐였다. 그냥 추측이 아니라 정말 다람쥐가 입을 벌리고 그 희한한 울음소리를 내는 것을 직접 목격했으니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 녀석은 내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도망가지도 않고 흑요석 같은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입을 벌리고 ‘끄아악 끄아악’ 소리를 질러대는 거였다. 뭐라고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행동으로 보나 울음소리로 보나 인상으로 보나 미국의 회색 다람쥐는 성깔이 보통은 아닌 거 같다.     


한국 줄무늬 다람쥐는 겨울잠을 자지만, 미국 회색 다람쥐는 겨울잠도 자지 않고 이곳저곳 누비며 자신이 저장해 둔 도토리들을 캐내 먹는다고 한다. 실제 겨울 산책로에서도 여전히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여기저기 가로질러 뛰어다니는 다람쥐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추운 겨울, 녀석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연말을 맞아 사람들은 집과 도시를 비워도 다람쥐들은 오히려 더 활개를 치고 돌아다닐 수도 있겠다 싶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지금처럼 인적이 뜸한 때 숲은 정말 녀석들이 차지한 왕국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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