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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살아야 하는 이유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by 제인

어렵게 미국에 보내줬더니 이게 초장부터 무슨 김 빠지는 소리냐 할 수도 있다. 분명 해가 저물 무렵이면 '(회사 안 가도 되는) 하루가 또 가버렸네' 라며 매일을 소중히 보내고 있는 건 맞다. Thank God!


하지만 조금 지내보니 미국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오래 살 곳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요약하자면 출장과 여행은 얼마든 좋은데 하루하루를 쭉 살아가는 건 어렵다. 이건 순전히 내가 마흔 넘도록 한국에서만 쭉 산 ‘한국 토박이’이기 때문이지, 결코 미국이 사람 못 살 곳이란 말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인종과 민족이 잘만 살아가는 곳인데 뭐.


문제는 언어다. 나는 영어를 못하지 않는다. 한국에선 ‘그럭저럭 잘한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언어의 기능 중에 우선 급한 게 의사소통이다. 내가 뭘 하려고 한다, 뭘 원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등등. 사실 이 정도만 영어로 하면 밥 먹고 공부하고 여행하고 거주 공간에 묵는 건 별 문제가 없다. (오히려 돈이 얼마나 있는지가 더 중요하지)


그런데 인간이란 게 로봇처럼 사실이나 의견 전달만 하는 게 아니다. 미묘한 감정, 상대에 대한 배려, 속상하고 힘든 것, 감동받고 기쁜 것, 유머와 위트, 좋아하는 마음 또는 불편한 마음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것 등등을 언어로 표현한다. 나는 지금 이게 안 된다. 한국말로는 얼마든 되는데 영어로는 안 된다.


“나 그거 줘” 라고 하는 것과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번에 저한테 해주신 조언도 있고 역시 그게 있는 게 좋겠더라구요” 라고 하는 건 실제 생활에서 꽤 차이가 크다. 전자처럼 말해도 욕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사람끼리 친해지고 그 사람을 좋아하고 싶어 지려면 후자가 돼야 한다. 한 마디로 미국에서 나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어렵다. 사회적 인간의 관점에선 용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언어적 표현 능력에다가 어느 국가나 사회 구성원들 간에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문화적 요소까지 더해지면 그 차이는 더더욱 크게 벌어진다. 입장을 바꿔봐도 ‘착하게 살더니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줬네. 경사났네!’ 라는 말을 외국인이 어떻게 알까.

돌이켜 보면 나는 한국말을 잘했고(;;) 상황마다 말실수도 많이 했지만 반대로 적절한 유머와 비유 섞인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게 했고 긴장을 풀어주고 회유하고 달래기도 했다. 필요한 경우엔 적절히 압력을 넣기도 했고, 진심 어린 감사를 감동적으로 전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회 속의 일원이 된 거다. ‘배고파요’ ‘샌드위치 한 개 주세요’ ‘은행 계좌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니요 저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만 가지고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서 지지고 볶고 울고 웃으며 감동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기는 어렵다.


한국이든 세계 최고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이든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좋은 점도 있고,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고 후진적인 면도 있다. 타국살이가 힘든 건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나에겐 ‘한 인간으로서 매력과 진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언어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 가장 크게 느껴진다. 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나 무시도 얼굴색이나 직업 이런 것보다 어쩌면 상대의 이런 언어 능력 부족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참고로 과거 한 정보기술(IT) 관련한 해외출장에서 나이 지긋한 일본인 기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그 분야에 대해 전문가였고 겸손하면서도 여유가 있었고 최신 정보와 자신만의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 꽤 유명한 기자였다) 하지만 영어가 부족해 행사 내내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못했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일찌감치 방으로 돌아갔다. 서구권 사람들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반면 질문내용만 들어봐도 어수룩하고 초급자 수준에 그쳤던 영어권 젊은 기자들은 그곳에서 활개(?)를 치며 주목을 받았다. 친구를 사귀는 자리가 아닌 비즈니스 행사에서조차 언어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앞으로 얼마간 펼쳐질 미국에서의 경험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경험이 될 거다. 그게 좋든 나쁘든(아…두렵다) 간에.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누군가와 가슴을 나누고 진심을 전달하며 ‘살아가는 곳’을 택한다면 나에겐 한국이 최고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보다 땅이 좁아도, 미세먼지가 많아도, 경쟁하며 미친 듯이 바쁘게 살아가도 말이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너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는, 한국에서 살게 될 날들을 기분좋게 생각해도 되는 흡족한 이유를 하나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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