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어루만져주던 엄마와의 시간을 추억합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지났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산 사람은 살게 돼 있어.라는 엄마 말처럼 나는 지금도 살아가고 있으니 맞는 말이기도 하고 아직도 엄마를 떠올리거나 대학병원 근처에만 가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걸 보면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매주 수요일 엄마와 손을 잡고 병원엘 갔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항암치료를 받으러 가는 그 길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고 하면 내가 참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래도 감수하고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엄마는 오래도록 식당일로 나를 먹여 살렸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속상하게 해도 엄마에겐 자식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공부를 못해서 한이 되었던 엄마는 자기 자식만큼은 공부를 시키면 그게 바로 행복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첫째 딸인 혜진이 에게 매일 같이 말했다. 외삼촌이 그렇게 나에게 말할 때 나는 참 서운했다고. 누나 그거 자격지심이야 대학교를 안 나왔다고 해서 왜 떳떳하질 못해, 누나가 떳떳하면 되잖아. 그때 혜진이는 어땠을까. 속에서 처음으로 천불이 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엄마가 말했다. 네가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자.
그때부터 공부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영 흥미도 소질도 없었지만 애써서 엉덩이를 눌러봤다. 세 살 터울의 동생도 있었지만 동생은 이미 가능성이 바닥이었다. 울고 싶은 마음을 눌러가며 공부를 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공부가 재미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 외삼촌이 그런 말을 한 게 화가 났다. 엄마의 돈으로 대학교를 졸업했으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어른만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었다. 악으로 깡으로 공부를 했고 상위권 아이들만 들어간다는 심화 반에 들어갔다. 딱히 기쁘지는 않았지만 엄마에게 소식을 전하니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기뻐졌다. 엄마는 바로 자신의 엄마에게 전화해 자랑을 했다. 혜진이가 공부를 너무 잘해서 전교에서 상위권 아이들만 수업하는 특별반에 들어가서 공부를 한대. 그렇다니까 나 닮아서 머리가 좋잖아. 꼭 전해줘 걔한테 우리 혜진이 너무 잘한다고. 별것도 아닌 걸로 너무 자랑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엄마가 너무 행복해 보이니 부끄러움쯤이야 내가 참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잘하는 아이들 틈 사이에서 점점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은 스트레스와 압박감 때문에 혜진은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뭣보다 자신이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 공부를 게을리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써보고 싶었다. 혜진의 친한 친구 중 예대를 준비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에게 입시에 관한 여러 정보도 들었다. 친구가 부러웠다. 자신도 글을 전문적으로 배워서 입시를 준비하고 싶었다. 그러나 재능이 없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때 친구가 시에서 고등학생 대상으로 글짓기 대회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단편소설 부문으로 참가하게 된다. 결과는 예상외로 대상을 받게 된다. 별건 아니지만 글 쪽으로 나가도 너는 가능성이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래서 곧장 엄마에게 소식을 전한다. 나 사실 글을 쓰고 싶어. 얼마 전에 대회에서 상도 받았어.
엄마는 상장을 받아 들더니 네가 시 대회에서 일등을 했다고? 너무 대단하다며 칭찬을 했다. 마음이 벅차올라 울컥했던 혜진은 단 한 번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래 이렇게 취미로 글을 쓰면 되겠다. 엄마, 그런데 나는 글을 진지하게 배워서 예대로 가보고 싶은데? 야, 너 그러려고 엄마가 가르치는 줄 알아? 지금까지 내가 왜 너한테 투자를 하고 힘들게 식당에서 일해서 돈을 벌겠니?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하는 거야. 너만은 공부해서 똑똑하게 힘들지 않게 일하라고. 글 쓰면 네가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아? 굶어 죽기 딱 좋아. 그냥 제발 평범하게 회사에들어가서 돈 타박타박 고정적으로 받으면서 그 돈을 모으면서 제발 그렇게 살아.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던 혜진은 마지막 말에 다시는 그 꿈을 돌아보지 않게 된다. 야, 그리고 그깟 상하나 탔다고 네가 잘 쓰는 걸까 과연? 전국에는 더 널렸을 텐데 고작 시에서 상을 탄 걸로 너무 들뜨지 마. 헛바람 들지 말고 공부하라는 소리야.
매일 새벽 한 시 제일 늦게 독서실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언제나 혜진이었다. 집에는 언제나 부엌에만 불이 켜져 있고 모두들 잠들어있다. 그러면 조심조심 화장실로 들어가 씻는다. 나오면 엄마가 잠에서 깨서 어느새 왔니? 하고 인사를 한다. 엄마를 쳐다보면 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면서도 동시에 특유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 눈빛은 도저히 다른 맘을 먹지 못하게 만든다. 아직도 어떤 눈빛이라고 한정하여 말 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나를 꽁꽁 묶어두는 무언가가 엄마에겐 항상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잘하고 있다는, 뿌듯하다는, 너를 믿는다는 그런 류의 기대 같은 것이었으리라. 나는 항상 그 기대를 깨트리는 걸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여전히 엄마가 불쌍했기 때문이다. 나를 안쓰러워하는 엄마가 불쌍했다. 나를 기특하다고 여기는 엄마가 불쌍했고, 나를 믿고 있는 엄마가 불쌍했다.
혜진은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끼는데 엄마는 자신을 너무 사랑했으니까.
그게 때로는 이해가 되질 않아서, 부담스러워서, 너무 벗어나고 싶어서 엄마를 미워했다.
그래도 다시금 돌아가곤 했다. 결국엔 엄마를 만족시키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냥 엄마를 웃게 하고 싶었다.
엄마는 너무 자주 울었다.
바람을 피우는 아빠 때문에.
그걸 말할 곳이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외로워서.
외할머니가 아무 말 안 하는 엄마는 잘 사는 줄 알고 자신에게 다른 형제들 걱정하는 소리만 늘어놓아서.
외삼촌이 속 모르고 자신을 가르치려 들어서.
그리고 이 모든 걸 알면서 때로는 혜진이까지 엄마를 외면해서.
내 잘못을 만회함을 포함해서 엄마를 울게 하는 것들을 없애주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가 원하는 결과로 대학교를 붙었다.
그때도 엄마는 식당에 있었다.
식당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다고 한다.
다들 딸 잘 뒀대. 네가 대학 제일 잘 갔다. 라며 말하는 엄마가 너무 순수해서 눈물이 났다.
순간 내가 엄마보다 한참 더 큰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엄마가 왜 그렇게 슬펐는지 모르겠다.
나는 엄마가 너무 좋아하면 가끔 슬펐다.
그해 겨울 안경을 쓰고 다니던 나를 위해 엄마는 라식수술을 해주겠다고 했다. 대학교에 들어가는데 안경을 벗고 편하게 다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 손을 잡고 들어가서 상담을 받는데, 라식 수술의 부작용을 듣던 엄마가 혹시 책을 읽을 때 불편하거나 한 부분은 없겠죠?라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처음에야 겹쳐 보일 수 있지만 나중에 되면 괜찮을 거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덧붙였다. 얘가 글을 쓰게 될 애거든요. 혹시나 눈이 불편해지면 안 되니까요.
엄마는 너무 자주 울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닮았다. 눈물이 많아졌다.
엄마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조차도 내 꿈을 이미 버렸는데,
엄마는 왜 그것을 주워서 소중하게 담고 있었을까.
그때의 눈을 가지고 글을 쓰는 지금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엄마는 알까.
그때 물어보지 못한 질문은 영원히 물어보지 못했다.
엄마는 그 뒤로도 너무 바빴고 항상 식당 가스불 앞에서 연기를 마시며 일을 했다. 그리고 건강검진을 받을 때가 돼서야 알게 된 것이다. 폐암 말기였다는 걸.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평생을 일만 하다가, 고생만 하다가 이렇게 데려가도 되냐고. 정말 억울하면 숨이 넘어갈 것 같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나는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는데 세상은 정말 잘도 돌아갔다. 모두가 질투가 났다. 친구들과도 살아가는 세계가 갑자기 달라진 것만 같았다. 나는 세상에 하나뿐인 엄마를 잃게 생겼는데 친구는 동생이랑 싸운 얘기를 하면서 나에게 속상하다고 할 때면, 도저히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그런 고민이 전부였음 좋겠어. 고민이 고작 내 동생이 나도 안 입은 옷을 먼저 입고 나가는 그런 게 고민이었으면 좋겠어. 있잖아. 우리 엄마는 지금 폐에 암이 있대. 숨이 안 쉬어진대. 그래서 나도 숨이 안 쉬어져. 왜 우리 엄마여야만 해. 다른 사람도 있잖아. 외할머니가 여자라고 공부를 안 시켜서 이런 게 아닐까? 우리 엄마도 배운 사람이었으면 힘들지 않고 편하게 일했을 것이고 그럼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 거야. 정말 할머니가 나빴어. 아니야 왜 할머니 탓을 해. 내 탓이야 내가 태어나서 그래. 나를 먹여 살리느라 엄마가 병이 난 거야. 차라리 나를 데려가. 나는 욕심이 너무 많아서 엄마도 가져야 하고, 내 꿈도 가져야 하고, 내 가족도 필요해. 이렇게 욕심이 많은 나를 데려가.
화살을 끔찍하게도 돌리다가 결국 비겁하게 나를 향해 돌리던 수많은 밤들. 그러나 아침이 오면 말끔한 얼굴을 하고 애써 밝은 척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향하던 수요일.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요일은 엄마와 내가 오랜만에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엄마는 사는 게 너무 바빠 도저히 쉬질 못했으니까. 쉬어도 너무 피곤해서 외출은 거의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놀러 간 적도 손에 꼽았다. 엄마와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그 30분이 애석하게도 봄날의 짧은 소풍 같은 것이었다. 대학병원의 시스템은 대기 시간이 상당히 길다는 점이다. 예약을 해도 우리는 한 시간을 항상 기본으로 기다렸다. 한 번은 엄마가 내 무릎에 누워 잠이 든 적이 있다. 이제 막 빠지기 시작한 머리를 만지면서 생각했다. 다음 생엔 우리 바꿔 태어나자. 내가 엄마를 먹여 살리는 거야. 고생 안 시켜 줄게. 아닌가, 그냥 우리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까?
장례식이 다 끝나고 돌아온 집의 냉기를 기억한다.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상주로 계속 맞절을 하며 무릎에는 멍이 들었고 꼬박 삼일 밤을 새워서 도저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지독하게 달라붙는 생각은 오로지 피곤하다 하나였다. 이런 생각만 드는 내가 참 패륜적인 것 같았지만, 본능이 감정을 이기는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은 너무 슬픈데 머리로 출력되는 생각이 참 이상했다. 그러나 도저히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이상했다. 이상함을 넘어서서 이상했다. 그때 아빠가 우리 찜질방에 가서 잘래?라고 말했다. 아마 같은 생각이었겠지.
찜질방 티브이에 나온 예능이 무엇인지도 지금까지 기억한다. 비정상회담이 나오고 있었다. 그걸 정말 아무 일 없는 사람들처럼 그냥 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동생 나 아빠 셋이 쪼르르 앉아서. 그리고 동생이 먼저 잠들었고, 아빠가 잠이 들었다. 나는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이다가 겨우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다시 엄마 없는 세상이었다.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가 그리워서 한동안 나는 고대병원 앞을 서성였었다. 그 입구까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갔던 길을 멍하니 걸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 항상 울면서 돌아갔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데 추억할 곳이 병원 앞이라는 게 너무 억울했다.
그래도 한동안은 매일 같이 갔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었다. 엄마랑 특별한 여행도 못 가봤고, 가장 최근의 기억은 병원을 갔던 기억밖에 없었으니. 함께 손을 잡고 얘기를 하면서 유일하게 엄마가 덜 아프던 시절의 가장 최근 기억이었으니까.
엄마와 내가 병원을 다니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지금 세세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엄마랑 내가 마냥 우울한 얘기만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나름 소소한 그날의 일상에 대하여 이야기했었다. 엄마 내가 티브이에서 폐암에 좋은 요리 레시피를 봤어. 언제 엄마한테 요리해줄게. 엄마 내가 카페에서 봤는데, 엄마랑 똑같은 케이스인데 새로운 치료법으로 다 나은 케이스를 봤어. 엄마, 오늘 그 연예인이 되게 웃긴 얘기를 했는데 들어 봐 봐.
남들이 보기엔 참 웃길 수도 있지만 그래서 나는 엄마랑 다닌 그 길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끔은 그립다. 엄마가 아픈 시기에 병원 다니던 그 길이 그립다고 말하는 거야?
그렇다 그립다. 엄마랑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시절이 그립다. 손을 잡고 걸어 다니던 그 순간이 그립다. 내가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게 그립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면 너그럽게 들어줄 사람이 있는 게 그립다. 내가 강한 척하는 게 아니라 약해 빠져 있어도 그런 모습까지 그냥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는 게 그립다.
마음이 울적해도 그냥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가만히 그냥 들어줘요.
체념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켜봐요.
가만히 어루만져주는 거예요.
그런 게 인생이라고 누가 그러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