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엉망진창으로도 괜찮잖아
나에겐 징크스 비슷한 것이 2가지 있다. 하나는 누군가와 약속을 잡거나 여행을 가려고 하면 날씨가 대체로 맑지 못하다는 점. 두 번째는 밥집이나 상점을 찾아가면 대체로 갑자기 급한 사정으로 쉰 다거나, 가게가 사라진 다거나 하는 점. 비슷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 적중률이 대략 80% 정도의 확률로 맞기 때문이다. 20% 정도는 무사한 여행과 약속을 그리고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최근 친구가 여러모로 우울해하여, 내 코가 석 자인 처지지만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하여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늘 서울행 여정을 시작했다. 집을 나서면서 첫 번째 징크스가 벌써 통했군! 생각하며 약속을 뒤로 미룰 것을 그랬나. 하는 생각을 몇 초간 했지만 이내 그녀의 얼굴을 그리며 버스에 올라탔다. 비가 오는 날 이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우산도 들어야 하고 흐르는 빗물이 찝찝하니까. 거추장스러운 요인이 많아지는 것은 우리의 행동을 굼뜨게 만든다. 그러나 한 가지 좋은 점은 비 오는 날 기사님이 틀어 놓는 라디오 소리이다. 평소에 멀어진 라디오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그리운 이에게 걸려온 반가운 통화를 받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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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약속에 응하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주현미 씨가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음을 몰랐으리라. 그리고 주현미 씨의 목소리가 그리도 편안하고 정겨운 지도. 비가 와서 그런지 사연 들은 어쩐지 감성적이었다. 한 청취자는 태국의 방콕에서도 한 시 간여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에서 30년간 살고 있는데, 처음으로 아이디를 만들고 가입하여 사연을 보낸다고 하였다. 라디오가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매개체이며 디제이님 덕분에 힘이 난다고.
디제이님은 사연을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먼 타국에서 30년을 떨어져 있으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어떤 마음일지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잠시나마 위로가 된다면 다행이니 앞으로도 그리운 소식 많이 전달해주세요. 라고 하였다. 30년간 타국에 떨어져 있는 사람의 심정을 그려보았다. 잘 그려지지 않는 마음의 모양이었다. 저 멀리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연결 고리가 되어 줄 작은 주파수를 찾아 나섰을 여정이 많이 외로웠을까. 마음속 공허한 구멍은 메워졌을까.
그리곤 이어서 두 번째 사연을 소개했다. 비가 오니 이런 사연 들도 많이 오네요. 5월은 엄마 기일이 있어서 저에겐 항상 힘든 달인데, 디제이 님의 해주시는 다정한 말들로 항상 위로를 많이 받아요. 언제나 세심한 공감과 엄마가 좋아했을 만한 옛날 노래가 나올 때면 마음도 함께 느슨해져요. 감사해요.
아, 언젠가 제가 말씀드린 적 있죠. 결국 부모님은 내 안에 있다. 정말 힘들긴 하지만 결국 부모님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우리는 여기 살아있어요. 그러니 결국 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이 위로가 될까 싶지만, 조금이 나마 마음이 편해졌으면 좋겠네요. 어머님이 계셨다면 좋아할 만한 노래 틀어드릴게요. Sarah Vaughan - A Lover's Concer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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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내려서 지하철을 타고 서울을 가는 내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이동했다. 익숙한 선율과 멜로디는 분명 나도 들어본 적 있는 노래였다. 과연 엄마도 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내 안에 있는 엄마라면 나도 알고 있으니 알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어쩐지 내리는 비가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친구와 만나서는 밥을 간단히 먹고 인왕산 근처 책방 겸 카페를 가기로 했다. 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한 배려와 인왕산의 풍경을 보며 힐링을 하고 싶은 친구의 바람이 딱 맞아떨어졌다. 가는 길에 빗줄기가 굵어져 온몸이 젖었으나 막상 들어와 따뜻한 차와 함께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니 운치가 있다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어째서 이렇게 출근은 힘든 지에 대해. 어째서 사람들은 이기적인 지에 대해. 어째서 벌써 어른이 되어버렸는지에 대해.
그녀와 나는 항상 그런 식이다. 잔뜩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하여 불만을 털어놓다 가도 길가에 핀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거나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종로의 풍경을 보며 감탄한다. 이것은 아직 우리가 순수함을 놓지 않았다는 증거일 거라 여기지만 그녀는 겸연쩍어 하며 부정할 것이기 때문에 항상 속으로만 생각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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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저녁을 먹기엔 애매하고 이대로 헤어지기엔 아쉬워 그녀와 걸어서 부암동으로 가기로 한다. 질리도록 가도 또 좋냐고 물으면 항상 좋다고 답할 정도로 너무나 정겹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대학 시절이 거기에 담겨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방문한 부암동엔 그새 차를 마시는 곳이 하나 생겼다. 급하게 방문한 곳 치고 꽤 본격적으로 차를 파는 곳이었다. 간단하게 차를 우려내는 방법을 배우고 한 모금씩 음미하며 차를 마신다. 한 잔에 이렇게 품을 들여서 마시는 것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진작 시작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잔을 씻어내고, 처음 찻물은 버려내고, 다시 물을 부어 30초 동안 기다린다. 그다음 비로소 잔에 따라내어 우려낸 차를 향과 함께 맛본다. 떫은맛이 지속된다면 온도를 내려 조금 낮은 온도의 물을 부으면 맛이 중화가 된다. 기다림과 멈춤의 시간이다. 선생님이 그렇게 강조하던 명상의 시간과 닮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차의 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홀로 책을 들고 차를 마시러 온 손님이 있었다. 친구는 저게 바로 용기야.라며 차를 홀짝였다. 언젠가 그 용기를 내어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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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에 대한 외사랑이 친구에게도 닿았는지 최근 관심이 생겼다며 마지막 즈음 LP 숍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나야 거부할 이유가 없어 그러겠노라 하고 찻집을 나와 비를 뚫고 갔는데, 왜 여기서 두 번째 징크스가 발동한 건지. 영업시간이 이제 끝났다고 하는 것 아닌가. 무려 40분을 넘게 이동해서 이제 딱 문을 잡은 순간이었는데... 망연자실 함에 힘이 빠져 그대로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데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엉망진창인데 재미있었다. 화면을 한참을 바라봤다. 발 근처는 축축하고 우산 끝에서는 비가 뚝뚝 떨어지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냥 이런 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산 신발이 구정물에 더럽혀지거나, 꼭 가고 싶던 가게가 이전을 하거나, 사랑하는 연인이 내 맘을 몰라주거나, 오늘처럼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어도 그냥 이런 날이 있을 수 있지. 오늘 라디오에서 좋은 노래를 알고, 인왕산 자락이 멋있었고, 우려 내린 차가 맛있었잖아. 한 부분이 망가진다고 해서 인생 전체를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시간은, 어떤 하루는 엉망진창이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