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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Apr 14. 2021

공백 없는 시간들

더 이상 슬프지 않을 때까지 슬프고 싶어요



  지난 일요일 친구와 와인 몇 잔을 마시고 기분 좋게 귀가하다가 에어팟 충전기를 잃어버렸다. 분명 귀에는 콩나물이 꽂혀있는데 콩나물이 편히 누워있어야 할 집은 어디로 간 건지. 집에 와서 깨닫자마자 곧장 밖으로 나가 와인바까지 뛰어가며 바닥을 살폈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친구는 그런 경우도 종종 있지 하며 당근 마켓에 요새는 분실물을 습득하면 글을 써서 주인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세상의 따스함을 믿어보자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원래가 쌀쌀맞은 사람이니까 그날 바로 쿠팡에 에어팟 충전기를 검색해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가장 최저가를 로켓 배송으로 시켰다.

  그리고 하루쯤 유선 이어폰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바로 다음날이 되니 에어팟 충전기가 도착해서 에어팟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마치 잃어버린 적은 없다는 듯이. 공백 없이 완벽하게 나에게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공백 따위도 허락하지 않는 나날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런 편리함에 감사하면서도 어쩐지 무서워졌다. 분명 일요일만 해도 나는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슬퍼했으나 화요일 저녁이 되자마자 다시금 원래의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작 하룻밤 정도 불편했을 뿐이다.

  긴 공백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감정 역시 흘려보내야만 하는 건 아닐까 어쩐지 압박감을 느낀다. 좋은 영화에 빠져 긴 여운을 끌고 가는 일. 좋은 한 곡을 질릴 때까지 듣는 일. 가만히 아무 말 없이 풍경을 바라보는 일. 더 이상 슬프지 않을 때까지 맘껏 슬퍼하는 일.

감정의 유효기간은 누가 정한단 말인가. 요거트나 채소나 과일이나 생선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존하는 것이란 말이다. 내 마음이 언제 질릴지 언제 그만둘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나조차도.

  심지어 마음은 상해서 썩어 문드러져도 그 상태로 계속 갈 수 있다. 차라리 저장식품이면 좋으련만. 된장이나 고추장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맛있어지는 마음과 감정만 남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독촉하지 마세요. 서두르라고 하지 마세요. 공백을 없애려 하지 마세요.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형국이라고 해서 공백을 가지지 못할 건 없어요. 인생 길다면서요. 긴 시간 속에 몇 년 공백이라고 모든 게 잘못되지 않아요. 공백 없는 시간들로 애써 잊어보았는데요 자꾸 더 생각이 나요. 빽빽하게 적어낸 답안지를 오히려 다시 다 지우고 싶어 질지도 몰라요. 그러니 기다려주세요. 마음이 허락할 때까지. 감정을 충분히 느껴요. 심호흡을 하고 머릿속으로 충분히 그려요. 같은 장면이어도 상관없어요. 눈물이 나더라도 신물이 나더라도 괜찮아요. 언젠가 다시 답안지를 채우고 싶어 질 때까지 새하얗게 빛을 내는 그 공백들을 가만히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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