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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Apr 22. 2021

가진 것이 없으니 손을 펼쳐 잡고 담 는다

조각이 나면 조각난 채로

  산산조각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할 만큼 힘들었던 시간을 지나오니 오히려 산산조각 난 것들이 좋아졌다.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겉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려고 애써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서 위태롭게 쌓아 올리는 대신 그냥 산산조각으로 살아가는 일. 마음을 진창에서 굴릴 때는 몰랐으나 지나고 보니 알게 되었다. 더 이상 허우적대지 말고 조각난 채로 사는 것만이 진정으로 살아가는 길이란 것을.

  조각난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 홀가분하게 쓰는 중이다. 비록 글의 첫째 줄에서 마지막 줄 까지 어떤 구성으로, 어떤 내용을 담아 완성을 시켜야 할지 매일 같이 전쟁이지만, 하루의 일과 중 글감을 생각하고, 아름다움을 찾으려 노력하고, 때로는 아픔을 깎아내는 마음을 느끼는 일련의 과정들이 힘들지만 즐겁다. 소리 없는 아우성. 교과서 속 역설의 세계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나날들이다. 무엇을 바라지도 않고 그저 써 내려간다. 쓸 수 있는 문장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참으로 다행인 하루가 된다.

  글쓰기만큼 가성비 좋은 심리치료도 없을 것이다. 감정과 이성을 적절하게 섞어 지난날을 반추하게끔 하는 과정은 내면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 준다. 감정이 과잉됐던 순간들을 진창 속에서 하나씩 꺼낸다. 찐득찐득한 진흙 덩어리들을 굳기 전에 얼른 털어낸다. 어떤 순간들은 이미 너무 굳어버려서 떠올리기만 해도 감정이 한 몸처럼 딸려오곤 한다. 언젠가는 그런 순간들은 독한 마음으로 내리쳐 부셔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중 가장 작은 조각만을 지니고 살 수 있도록.

  대학교 2학년쯤 진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했었다. 엄마는 글 쓰는 것을 말렸으나, 어떻게든 그쪽으로 진로를 잡고 싶었기에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국어국문과를 지원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말했다. 인생은 때때로 짓궂은 장난 같아서 비극이라고.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그 한 곳만 합격을 했다. 대충 점수를 맞춰서 생각 없이 지원했는데 내 미래가 되어버렸다. 그에 응당한 벌을 받기라도 하는 듯 뒤늦은 상실감과 후회가 밀려왔다. 행정학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예산편성에 대해 배우고 정치학을 공부했다. 관심이 없으니 수업시간에 집중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힘들게 등록금을 마련해주는 엄마를 생각하며 억지로 꾸역꾸역 공부를 해냈지만 뿌듯함이라곤 없었다. 내가 왜 여기로 흘러왔는가.

  나는 너무 겁이 많다. 애초에 가질 수 없는 사랑인데 잃을까 봐 겁을 내는 사람처럼 항상 뺏길까 봐 불안해한다. 어차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빨리 알아차렸다면, 도서관에서 행정학 서적을 뒤지는 대신 문학작품을 가까이했다면 지금쯤의 나는 어디에 있을까.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좌절감에 그렇게 좋아하는 책도 대학시절엔 거의 읽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이 넌 항상 책을 끼고 살더니 요샌 점점 안 보인다.라는 말에 그저 웃음 지었던 건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좋아하는 일 하나도 지켜내지 못했다는 걸 들키기 싫었던 내 마지막 자존심.

  역설적이게도  자존심마저 버리고 나서야 다시 글과 책을 사랑할  있게 되었다. 그래 내가 뭐라고 그렇게 몸을 사릴까. 빈손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어차피 빈손이니까 아무거나 잡고 담아올  있잖아.  멀리 손을 뻗는다. 청명한 하늘도 푸릇한 나무도 어느새 주황빛을 머금은 홍시 같은 노을도  손안에 있다. 입안에 데려오면   하게 퍼질  같은 낙조의 향연. 거칠  없이 손을 뻗어 나의 세계로 가져와 음미한다. 이제부터다. 아직 세상엔  볼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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