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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May 01. 2021

어디서나 잘 자라는 힘에 대하여

원더풀 미나리! 영화 '미나리'를 보고

  토요일이 왔다.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매주 토요일은 아무런 약속 없이 병원만을 다녔다. 상담을 받고 약을 타고 집에 돌아오면 하루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가끔 선생님은 주말이 아깝지 않냐며 미안해하신다. 언젠가는 입원권유를 받기도 했다. 차라리 치료에 힘쓴 뒤에 사회생활로 복귀하는 편이 더 이롭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러나 먹고사는 것이 중한 일반 수저인 나에게는 치료에만 전념하는 것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꼴이다. 즉, 사치인 것이다. 따라서 평일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는 병원에 가는 일상이 아깝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다. 어쩔 수 없으니까. 오늘도 현실적인 선택으로 병원에 다녀왔다.

  오늘은 오랜만에 우울지수와 불안지수를 다시 테스트해보자고 하셨다. 일종의 중간점검 같은 것이다. 약을 복용하고 일주일마다 상담을 통하여 상태를 체크하지만 보다 더 객관적인 수치화의 도움을 받는 과정이다. 오랜만에 마주한 문진표의 질문들은 여전히 긍정보다는 부정에 자연스레 손이 머문다. 하지만 스스로도 느낄 만큼 오늘은 마냥 극단의 감정을 택하진 않았다. 뭔가 나아진 걸까? 살짝 기대를 품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우울증세가 지난번보다 낮은 수치로 나왔다고 하셨다. 그러나 불안 수치가 아직도 높게 나와서 약을 조금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불안감을 느낀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미칠 것 같은 불안감과 알 수 없는 답답함은 내 안에서 항상 파도처럼 왔다 간다. 늘 그 앞에서 발이 젖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어느 순간 집채만 한 해일이 되어 모든 걸 쓸어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눈치채신 건지 최근 기분이 어떤지 물어보셨다. 혜진 씨는 항상 모든 걸 다 괜찮다고 하시는 사람이라는 걸 제가 이제 좀 알아서요.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최근에 힘든 일이 있으세요?

  회사에서 업무적으로 실수를 좀 했는데 결과적으론 잘 넘어갔지만, 스스로 용납이 안 되더라고요. 계속 스스로를 탓하고. 다른 관계적인 건 문제없어요.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같이 일하는 분들이랑 많이 친해졌죠. 그런데 그렇게 관계가 깊어질수록 전 힘이 들어요. 더 완벽한 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죠. 사실은 너무나도 형편없는데 완벽한 사람인 척, 활기찬 모습인 척. 저를 한껏 연기하는 기분이 들어요. 누구나 다들 어느 정도 그렇겠지만, 전 그게 너무 심해서 압박감으로 짓눌린다는 기분이 들 정도예요.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못하죠. 그런 생각도 했어요. 어쩌면 회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지 않을까. 조직생활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 아닐까. 사회생활을 하면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아닐까.

  혜진 씨, 누구나 그런 마음은 들 수 있어요. 오히려 잘하고 싶으니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해요. 어쩌면 저희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자극제 같은 것이죠. 하지만 그게 너무 심해서 혜진 씨가 그렇게 완벽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건 다른 문제예요. 사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딱 하나를 원하고 있어요. 혜진 씨의 행복.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부터 출발이죠.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 실수도 줄이려 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려고 노력하죠. 그러나 실수가 많다고 해서, 활기차지 않다고 해서 버림받거나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생각은 본말이 전도된 거죠. 행복해지기 위해 시작한 일 자체에 몰두해서 너무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그 마음과 한 번 대화해 볼 필요가 있어요. 아마 그 마음에게 말을 걸면 이만큼이나 힘들었니? 내가 너무 했네 미안해. 라며 사과할지도 몰라요.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것들은 사실 행복해지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행복은 사라진 채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더 불행한 것은 도무지 어떻게 스스로와 대화를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는 나였다. 선생님은 상담 말미에 여력이 된다면 혜진 씨가 상담치료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언젠가 그 대화의 시작을 위해서 나는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병원 진료가 끝난 후에는 종종 스스로에게 보상을 하고 싶어 진다. 내가 자주 가는 정신질환 커뮤니티에도 종종 '보상 푸드'라고 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힐링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하는 글들이 올라온다. 그러면 댓글에는 오늘도 수고 많았다고 칭찬을 해주곤 한다. 오늘은 어쩐지 그런 보상 푸드를 먹고 싶어 지는 날이었다. 그래서 동생을 불러내 쌀국수를 먹었다. 급격히 바람이 부는 날씨에 따끈한 쌀국수 국물을 먹으니 찰떡궁합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 '미나리'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미나리'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본인의 어린 시절을 복기하며 써 내려간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가족이 정착하는 과정을 담았다. 그러나 불러오는 감정은 지극히 보편적이다. 그것은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나리는 이역만리 타국으로 설정된 미국이라는 장소적 배경을 제외하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 사고들은 보편적인 우리네 가족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

  현실과 꿈. 물질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 언제나 둘은 함께 가기 힘들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우리의 삶은 편하게 굴러가곤 한다. 둘 다 갖기 위한 과정은 험난하고도 멀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러한 현실과 이상의 갈등으로 인한 미묘한 균열을 묘사한다. 영화 '라라 랜드'에서 사랑을 하던 두 주인공이 각자 꿈을 따라가면서 사랑은 깨져버리듯 '미나리' 역시 주인공인 스티븐 연의 꿈을 찾아 도심에서도 한참 떨어진 아칸소로 정착을 결심했으나 그 과정은 매끄러운 포장도로가 아닌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에 가깝다. 이상을 찾아 떠나는 모험에 끼어드는 현실의 고단함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화는 그런 지점을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그저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래서 중반부까지는 사실 영화보다도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사이사이 아름다운 자연, 풍광, 색감을 통해서 관객에게 동화 같은 순간을 선사함으로써 자극적이지 않은 순한 맛으로도 영화적 감동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할머니 역할의 윤여정이 등장하면서부터 영화는 좀 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박차를 가한다. 현실과 꿈 사이에 영화는 '가족'이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원더풀 미나리"라며 웃는 윤여정의 장면은 영화를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장면이 된다. 왜 굳이 영화의 제목을 '미나리'라고 정했을까 하는 것에 대한 미스터리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풀리기 때문이다.

  스티븐 연은 이상을 좇는 인물이다. 본인이 수십 년간 해오던 일은 본인의 뜻대로 선택한 일보다는 현실적으로 선택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가장으로서 보다 더 나은 모습의 상태로 있고 싶어 한다. '이상'적인 모습.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정말 즐거운 상태로 있는 것. 모두가 꿈꾸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반면에 한예리는 보다 현실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 미래가 아닌 당장 현실 가능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이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한다. 꿈만을 좇기에는 심장이 아픈 아들 데이빗과 가정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재정적인 문제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이에서 윤여정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매우 이상적인. 영화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현실에 있을 법하면서도 비현실적이다. 데이빗의 말 그대로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이다. 드 넓은 농장 땅을 사느라 돈이 없어 바퀴 달린 트레일러 집에서 살아도 "얘, 바퀴 달리고 재밌다"라고 말하는. 손주인 데이빗이 오줌을 음료수처럼 따라가지고 와서 건네는 장난을 쳐도 "재밌었어"라고 말하는. 어떤 상황이나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처럼 그녀는 건강하게 잘 자란다. 이것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줏대 없는 갈대 같은 모습이 아니라 바람이 흐르는 대로 때 맞춰 온몸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는 용기 있는 자의 모습이다.

  이런 윤여정이 시들 때 가족은 서서히 붕괴된다. 점점 꿈만 생각하고 가족은 뒷전인 남편에 대하여 한예리는 지쳐가고 스티븐 연은 이런 자신을 가족마저 기다려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실망한다. 그런 엄마 아빠를 바라보며 데이빗은 할머니 때문이라고 원망한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면서 엄마 아빠가 싸우기 시작했다고. 그러나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가 시들어 버릴 정도로 가족이 두 발로 버티고 있는 땅이 서서히 메말라가고 있다는 신호였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작물의 토양만을 신경 쓰는 날들이 계속되고 결국 영화 후반부에 윤여정의 실수로 인하여 농작물 창고가 불에 타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점점 불이 타올라 영화관에 불길이 가득 찼을 때 어쩐지 후련함을 느꼈다면 나만의 착각인 걸까?

  잿더미만 남은 아침. 아무것도 남지 않은 줄 알았던 농작물 창고 옆 트레일러 안. 땅바닥에서 네 가족이 껴안고 자는 모습을 윤여정이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가 길렀던 미나리 밭에 가서 스티븐 연은 미나리를 따면서 말한다. '돌보지 않아도 잘 자라고 있었구나. 할머니가 자리를 잘 골랐어'라는 대사와 함께 영화는 끝난다.




  앞서 본말이 전도된 나의 상황에 대하여 말했다. '미나리'역시 그런 상황을 보여준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떠나온 곳에서 행복해지는 과정 때문에 때때로 지겨워하고 서로 싸우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싸움은 가족이기에  쉽게 들불처럼 번지곤 한다. 가족은 언제나 미나리처럼 가만히 두면 알아서  자라는 존재이니까. 어렵게 수확하는 농작물처럼 공을 들이지 않아도, 품을  들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렇기에 때로는  힘을 얕보게 된다. 무슨 힘이 있겠어.  알겠어. 같은 마음들.

  나 역시 아직도 욕심이 많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서 살고 싶고, 아직 더 행복해지고 싶다. 마음에 아주 작은 생채기라도 나는 날에는 이 세상에서 나만을 가엾어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날에는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인 동생이 옆에 있더라도 아무 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픈 날이 더 많은 것이 인생이라는 걸 받아들인 다면 아무 곳에서나 자라나는 힘을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찌개에도 넣어먹고 김치로도 담가먹는 미나리처럼, 진부하지만 아플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나를 지탱해주는 너무 나도 흔해서 바람에 부유하는 먼지 같은 그 힘. 가족이라는 이름이 주는 힘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잘 자라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가끔씩 본말이 전도될 때 다시금 바로 잡아 줄 것이다. 언제나 소중한 것은 가까이에 있다고.

  동생과 영화를 보고 다정하게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생이 길가에 돋아난 쑥을 발견했다. '예전에 엄마랑 쑥 캐러 다녔었는데. 생각난다' 봄이면 엄마와 동생은 가끔 쑥을 캐러 다녔던 기억이 났다. 아마 그때에 나는 굳이 뭣 하러 쑥을 캐러 다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사 먹으면 그만이잖아 귀찮으니까 안 갈래. 라며 단 한 번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친 나와 달리 들풀 속에서 쑥을 찾아낸 동생은 볼 때마다 엄마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을 계기로 나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 이런 가족을 만들어 준 엄마에게 감사하다는 생각.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 가끔씩 폐허가 되어 잿가루만 폴폴 날려도 밤이면 껴안고 잘 수 있는 가족이 있어 다시 어디서든 잘 자랄 수 있다고 그래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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