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은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어린 시절 들은 동요 중 가장 슬픈 것은 '옹달샘'이었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맑고 맑은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어린아이가 뭘 그리 슬펐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언제나 마지막 가사인 '물만 먹고 가지요'가 그렇게나 슬펐다. 물'만'이라는 표현이 어쩐지 오랜 기다림으로 찾아 헤맨 것들로부터 버려진 느낌이랄까.
옹달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과연 무엇을 바랐을까. '누가 와서 먹나요'라는 표현은 두 번이나 반복된다. 이러한 강조를 통하여 얼핏 다가와서 물을 먹어주면 옹달샘의 소원은 이뤄지는 걸로 보인다. 그렇다면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을 먹는 것은 기쁜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물'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옹달샘이 바라는 바가 더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물'을'먹고 가지요.라는 끝맺음이었다면, 옹달샘은 토끼로부터 구원을 받는 서사를 완성시키게 된다. 그러나 미묘한 조사의 비틀림으로 인하여 열린 결말의 서사로 끝나게 된다.
옹달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유추해보는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창작자의 의도일까? 숲이 울창한 산속에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곳, 오로지 햇빛만이 비추는 작은 샘물 하나. 오래도록 그곳에 머무르며 느낄 감정은 무엇일까. 외로움일까 아니면 두려움일까 아니면 편안함일까.
의미를 제대로 유추해보기 위해서는 문장의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만'은 조사로 쓰일 때 다음과 같이 활용될 수 있다.
1. 다른 것으로부터 제한하여 어느 것을 한정함을 나타내는 보조사 : 그렇게 고기만 먹으면 몸에 좋지 않아.
2. 무엇을 강조하는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 : 그를 만나야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3. 화자가 기대하는 마지막 선을 나타내는 보조사 : 열 장의 복권 중에서 하나만 당첨되어도 바랄 것이 없겠다.
4. '하다', '못하다'와 함께 쓰여 앞말이 나타내는 대상이나 내용 정도에 달함을 나타내는 보조사 : 청군이 백군만 못하다.
5. 어떤 것이 이루어지거나 어떤 상태가 되기 위한 조건을 나타내는 보조사 : 너무 피곤해서 눈만 감아도 잠이 올 것 같다.
옹달샘의 '물만 먹고 가지요'는 1번에 해당한다. 제한하여 어느 것을 한정한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옹달샘이 바라는 바가 더 있다는 유추는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해 낼 수 있다. 이제 마음껏 상상해도 옳다. 상상은 청자의 마음에 따라 각기 다를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옹달샘이 외로워서 더 놀아주길 바랐을 텐데, 물만 먹고 가서 서운했을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앞에도 말했지만 '누가 와서 먹나요'는 먹기만 해 주면 행복해요! 가 아닌, 누가 와서 먹기라도 해 줄까? 놀아줄 사람도 없는데. 같은 한탄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지 않은가 서운해도 말할 길이 없을 때 그저 한탄하는 것에 그치고 마는.
사실 어른이 될수록 작은 것 하나에 일희일비하면서 모든 감정을 다 쏟아내는 것은 유치한 마음이 아닐 리 없다. 그렇기에 그저 먼 곳에 각자 옹달샘 하나를 파놓고 혼자 외치는 것이다. 서운함도, 외로움도, 심심함도. 하지만 반대로 어른이 되었기에 우리는 더 용감하고 강해졌다. 마음이 물만 먹고 떠날 때, 잡아 세운 뒤 무엇이 더 필요하니? 라며 스스로 말을 걸 수 있는 힘을 분명히 갖고 있다. 새벽녘 푸르스름한 공기 속 밝게 들어오는 빛이 나뭇잎을 살짝 건드리면 잠에서 깬 나뭇잎은 살랑이며 바람도 같이 깨운다. 바람과 나뭇잎이 같이 놀다가 맑은 샘물 위에 나뭇잎 하나를 떨어트릴 때. 어린 시절과 같이 유치하고도 작은 마음으로 슬픔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나뭇잎이 떨어지는 찰나와 같을 것이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손에 잡아 참방참방 물놀이도 하고 오래도록 물을 마시며 쉬어갈 테니까.
그렇게 마음은 확장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