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연솔 May 10. 2021

글자와 글자가 맞닿는 순간

첫 글에 대한 단상


  엄마가 말해주기를 어릴 적부터 나는 책을 끼고 살았다고 했다. 내성적이고 숫기 없는 성격도 한몫하여 사람보다 책과 더 친해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글도 또래 아이들에 비하여 빨리 떼었다고 한다. 더듬거리며 ‘기역’, ‘니은’ 읽어 내려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미 동화책을 들고 문장을 읽는 모습을 보고 엄마는 혹시 우리 딸이 천재인 건가? 하고 설레는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자라면서 그 희망에 배신을 당했다며 투덜거리게 되지만.

  확실히 엄마의 말처럼 ‘누구 닮아서 이러니’라는 말을 질리게 들을 정도로 읽고 쓰기를 좋아하긴 했다. 엄마와 아빠는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 틈 사이에서 돌연변이처럼 태어난 나는 언제나 혼자서 집안의 큰 책장에 책을 사서 채워 넣었다. 용돈을 받으면 무조건 서점으로 달려갔다. 신간을 둘러보는 일은 그 무엇보다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를 싫어하는 부모는 없을 테니 엄마 역시 항상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 가끔 값이 비싼 것 같아 망설이면 ‘책을 읽는 데는 돈을 아끼지 마’ 라며 짠순이 엄마의 지갑이 쉽게 열렸다.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며 삶이 궁핍해 마음이 가난한 나날에도 밥에 물을 말아 김치랑 먹을지언정 책을 사는 것은 망설이지 않았다.

  많이 읽는 사람은 반드시 쓰고 싶어 지는 날이 온다고 하였던가. 어린 시절부터 첫 독자는 항상 엄마였다. 방학숙제로 써야만 했던 동시 쓰기에 재미를 느껴 그 해 여름 내내 스케치북에 시를 써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아이는 칭찬을 먹고 자란다는 말을 믿는다. 엄마가 독자로써 해준 첫 칭찬이 글을 써 내려갈 때 항상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쓴 시는 대략 이렇게 시작한다. ‘ㅣ’는 서있고 ‘ㅡ’는 누워있다. 우리가 서있기도 하고 누워있기도 하는 것처럼. 글자들도 서있거나 누워있다. ‘ㅢ’는 서로 맞닿아있다. 우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처럼 글자들도 함께 맞대고 살아간다.

  별것 아닌 그 시를 엄마는 엄청난 칭찬을 해주었다. ‘어떻게 글자가 서있다고 표현을 했어?’ 외할머니가 집에 왔을 때도 ‘대단하지 않아? 어린아이가 상상력이 좋지 않아?’

  어깨가 으쓱했다. 내가 써 내려간 글자로 누군가를 만족시킨 다는 짜릿함을 알아버린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종종 글을 쓰면 바로 엄마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시, 독후감, 소설, 에세이, 리포트, 발표자료, 편지. 참으로 다양한 글들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평가받았다. 엄마는 가장 친절한 독자이자 냉혹한 비평가였다. 어떤 글이든 글의 맛을 알았다. 교내 글짓기 대회에 나갈 때마다 엄마에게 글을 보여주면 기가 막히게 수상 여부를 점치곤 했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큰둥하다면 어김없이 수상하지 못했다. 혜진아, 엄마는 글을 쓸 줄은 모르지만 읽을 줄은 알아.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의 노력과 정성을 간파해 내는 능력이 그녀에겐 있었다.

  억지로 감동을 주기 위해 표현이 과잉되거나 현학적인 말로 매혹시키려는 글을 그녀는 골라냈다. 생선에 가시를 발라내듯 나조차도 자신 없이 써 내려간 문장을 쏙쏙 집어냈다. 그럴 때면 발가벗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대충 그럴듯한 표현으로 눙쳐가며 상대를 속이려 하는 것은 기만이라는 걸 그때 배웠다.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문장은 어떤 타인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도.

  최대한 쉽고 담백하게 쓸 것. 그리고 솔직하게 담아낸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채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이것은 그녀가 내게 준 글쓰기 원칙이다. 어쩌면 어릴 적 내 동시는 엄마의 평가처럼 좋은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글자와 글자가 맞닿는 순간과 일상을 보내는 순간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맞닿는 순간은 언제나 간결한 문장으로. 화려하거나 과한 수식어를 쓰지 않는다. 애써 어려운 말로 현혹하려 하지도 않는다. 함부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 애써 이해하려 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신중하게 글자와 부닥트리며 일상과 맞대어 본다. 치열하게 버무리다 보면  줄의 문장이 완성되고 문장이 시작되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글자가 맞닿기  어느 것에도 부합되지 않던 일상들은 시가 되고 에세이가 되고 편지가 된다. 그리곤 나의  독자를 생각한다.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은 글이 많아진 요즘. 가만히 그녀의 반응을 상상해 본다. 냉정한 그녀는 혹평을 서슴지 않을  같다. 만족시키는 방법은 사실 이미 알고 있다. 이렇게 시답잖은 문장이라도 쓰다 보면 언젠가 스스로 만족하는  만한 문장도 하나쯤은 완성할  있겠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여름과 잠시 술래잡기를 할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