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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Sep 14. 2021

여름, 그 끈적하고 따가운 맛

삼키기 어려운 여름을 맛 보는 법

몇 번 언급한 적 있지만 여름을 싫어한다. 여름의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사계절을 사랑한다. 보이지 않는 실금 같은 구역을 엉금엉금 기어서 가면 악어 떼를 마주하듯 다음 계절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계절 중 여름은 늘 제외이다. 광선이 내리쬐듯 강렬한 햇빛은 가만히 있어도 속마음을 다 투시할 것만 같은 위력을 뽐낸다. 그 위력이 밤새 꺼지지 않는 공장처럼 열기를 가할수록 불면을 가속화시키는 첨가제 역할을 한다. 밤과 밤사이를 유영하며 현재와 꿈 사이를 혼동할 때 여름은 가차 없다. 네가 어디에서 길을 잃었든, 어디로 갈 작정인지 모르든 상관없다. 혼란한 마음을 봐주지 않고 계절이 깊어짐에 박차를 가한다. 내리지 못할 쾌속선을 타고 거칠게 달려가는 것처럼 여름은 거침이 없다. 그 거침없음에 언제나 모양 빠지게 나뒹굴고 마는 것이다.

어느 밤 괜한 객기를 한번 부려보았다. 밤에 처방받은 수면제 없이 잠에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약을 처방받고 챙겨 먹으면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약을 좀 먹지 말아 봐’ 혹은 ‘약을 언제까지 먹어야 해?’ 나는 답이 정해진 질문을 듣는 것을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는 사람인 걸 확신하게 되었다. 저 두 가지 질문에 신물이 났으니까. 첫째, 약은 나도 먹기 싫었다. 나도 약 없이도 불안하고 싶지 않고, 우울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약 없이도 잘 자고 싶은 건 이미 오랜 소망이다. 둘째, 약을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지 나도 알고 싶다. 여름만큼 지치게 하는 건 기약 없는 기다림 혹은 이룰 수 없는 소망 같은 것들이 아닐까.

불쾌하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무거워진 공기를 들이마셔 본다. 가슴은 여전히 미치도록 답답한데 불어오는 바람은 이미 액체가 되어 꿀렁꿀렁거린다. 슬라임의 그것처럼 혹은 어린 시절 개구리 알처럼 미끈하며 끈적하다. 베란다를 통해서 들어오는 끈적한 그것들이 거실을 온통 잠식해 버릴까 겁이 난다. 실려온 바람 한 점을 떼내려 해도 기다란 실선을 그리며 바람이 머문 자리가 온통 거미줄처럼 주변을 뒤덮을 것만 같다. 거대하고 웅장한 액체의 늪에서 버둥거리는 한 마리의 벌레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아주 달콤해서 입에 닿으면 눈살을 찌푸리게 될 만한 딸기잼병 속에 내가 들어온 것은 아닐까? 어리석은 생각을 하며 밤은 점점 깊어간다. 오로지 나 바라는 것은 자유였던가. 기억이 아득하다. 내가 지금 오로지 바라는 것은 명확히 알겠다. 어서 빨리 버석한 바람 한 조각이 찾아오는 계절이 되기를.

새벽 3시. 이 시각이 되면 반쯤은 체념한 마음이 든다. 그래, 차라리 잠을 포기하자. 아직까지도 뚜렷한 눈꺼풀의 움직임을 느끼며 공연히 옛일을 생각해본다. 싫어하는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 사랑할만한 아주 작은 조각을 찾아내어 부풀리기. 이다지도 싫어하는 여름을 사랑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조각을 찾아볼까. 어릴 적에 아빠가 출장으로 자주 부재중일 때. 엄마와 나, 동생은 셋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 누워 잠에 들 때가 많았다. 같이 천장을 바라보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었다. 아주 먼 미래 이야기를 할 때도 있고, 구구단을 못하는 나에게 8단을 한 번만 더 외워보고 자자고 재촉할 때도 있었다.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이야기는 엄마가 만들어 내는 얼렁뚱땅 이야기들이었다. 그때의 나는 늘 궁금했었다. 모든 엄마가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인지. 엄마의 이야기는 동화책 속의 신비로운 장면과 현실 속의 얄궂음 사이 그 중간 어딘가에 있었다. 즉, 지금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표절이 가미된 재창조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 예로 할미꽃 이야기를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 될 때까지 실화로 알고 있었다. 엄마는 그걸 아는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하면서, 세부적인 이야기도 우리가 알법한 지명과 우리가 알법한 인물을 섞어서 이야기를 재창조하였다. 너무 불쌍한 이야기 아니냐고 울던 내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꼈던 놀라움이란. 배신감도 아니고 놀라움이 들었다. 오히려 진짜 이야기는 심심했다. 엄마가 섞어준 이야기가 더 맛있었다. 마치 내가 만들어 먹는 간장비빔국수는 어딘가 심심하지만 엄마가 해줬던 국수는 더 감칠맛이 났던 것처럼.

그러고 보니 간장비빔국수는 여름의  중에 하나였다. 유달리 여름이 되면 입맛을 잃어버려 입이 짧아지는 내게 엄마가 만들어주는 특식이었다. 국수 소면을 삶고, 간장을 살짝 넣고, 참기름을 둘러 비벼먹는 별것 없는 레시피. 그런데 이상하게도 맛이 있었다. 거기에  김치 하나를 올리면 저절로 식욕이 돌았다. , 하지만 지금은  간장비빔국수도 소용이 없다. 내가 직접 만드는 국수는 그때의 국수가 아니다. 이건 단순히 시간의 흐름인 걸까?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닌 것처럼 그런 종류의 일일까? 아니면 사람의 일일까. 어쩌면  세상에는 어떤 사람이 해야만  맛이 사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름의 국수는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엄마가 해야만  맛이 살아나는 것이다. 어쩐지  뒤가 텁텁한  목이 메는 기분이 들지만 한편으론 경이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구 상에 수많은 일들   사람이 필요한 일들. 그런 일들이 쌓여가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애가 타는 여름 속에서 티끌만  사랑이라도 사랑의 조각을 찾으려 애쓰며, 끈적거리고, 텁텁하고, 따갑지만 아직은 씹어 삼킬  있을만한 맛이라고 위로하며 이번에도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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