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 절벽 위 암자에서 살았다

by 윤종현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특별했던 경험은 해인사

지족암이란,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절에서의 행자 생활이었다. 지루하기만 했었던 불국사에서의 행자 생활을 빼면 이곳에서는 10개월 정도 있었는데, 해발이 1km 가까이 되는, 밑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아래로 펼쳐질 정도로 가파르고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의 난 23살이었는데 오래도록 해오던 영화 일을 하다가 극심한 우울증을 생애 처음으로 겪게 되었고, 그 경험을 하고 난 후의 나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고 사춘기 시절에나 할 법한 ‘왜 사는 걸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대답, 무언가 진리라고 부르는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들에 깊이 심취하게 되었고 관련 서적들을 무지하게 많이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다 인도에서 수행을 하며 수행자가 되는 꿈을 꾸기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에 친형의 소개로 해인사 지족암에 있는 해찬 스님이란 분을 만나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 스님의 말씀이 불교로 출가를 하게 되면 인도에서 수행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행들을 다 해볼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래, 이거다 싶어서 1주일 후에 출가를 하러 오겠다는 말을 남긴 후 집으로 돌아와서 1주일간 가까이 지내온 지인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젊은 시절부터 수행자의 꿈을 간직하셨던 부모님, 그리고 출가하게 될 절에서 이미 6년 전에 행자 생활을 6개월 정도 하고서 하산한 형, 그리고 같은 성향의 누나까지 가족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해인사 지족암으로 출가를 하였다. 약속한 1주일이 되던 날에.


애초에 종교와는 거리가 먼 무신론자에 불교와도 거리가 먼 과학을 믿는 평범한 이에 불과했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진리라는 답이 있을 것만 같았고 그 스님의 말씀대로 해볼 수 있는 모든 수행을 통하여 그 답을 찾고자 하는 열망만은 누구보다 컸던 것 같았다.


하지만 거의 평생을 도시에서만 살아오다 시골도 아닌 숲 속의 정상 부근, 절벽 비슷한 곳이 오늘부터 내 집이 되었다는 사실은 낯섦보다는 두근거림을 주었다.


처음 한 달 정도는 밥을 해주시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곧 그만두시고는 내가 하루 3끼를 모두 만들게 되었다. 보통은 한 끼에 4~5인분을 만들었지만 여름에 계곡 안으로 축대가 무너져 공사를 할 적에는 점심 한 끼에 14인분을 혼자 만들 때도 있었다.


절에서는 예불이라고 하여 새벽, 사시, 저녁 시간에 3번에 걸쳐서 예배나 미사 같은 기도와 수행의 시간이 있는데 어쩌다 보니 스님이 아니고 행자인 내가 그 모두를 하게 되었다.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고 절을 하고 작은 종도 치고 큰 종도 치고, 모두가 신선한 경험이자 하나하나의 수행으로 느껴지곤 하였었다.


특히나 절을 하면서는 그동안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조금씩 떠올려가며 많은 것을 느끼고 알게 된 순간이었다.


겨울에는 화목보일러를 때어서 큰 절에서 구해온 엄청난 크기의 통나무들을 쟁여 놓았다가 그때그때 도끼질을 해서 나무를 팬 다음 불을 붙여 보일러를 사용했는데, 처음에는 서툴렀던 도끼질도 어느새인가 대충 휘둘러도 나무는 산산조각이 났다.


어느덧 부엌에서 나는 칼질 소리도 탁 탁 탁이 아닌 따다 다닥으로 바뀌어 갔고 가스레인지 4개에 부르스타 2개까지 한 번에 6개의 불을 쓰며 요리를 할 때도 있었다.


그곳은 정말 아름다웠다. 일타 큰스님께서 오랜 세월 절에 주석하시면서 큰스님의 애정 어린 손길이 곳곳에 묻어 있던 꽤 크다면 큰 작은 암자였는데, 바로 옆에 있던 성철 큰스님이 계셨던 백련암만큼이나 역사가 있는 곳이었다.


단지 내가 출가했을 때는 일타 큰스님께서 열반하신 지 6년 정도가 흘러서 그 흔적들은 여전했지만 많이 조용해진 상태에서 행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정말 예쁜 정원이 있었는데 100년이 된 고사목 위에 매일 앉아 있는 산비둘기와 하트 모양 같은 소나무부터 인도에서나 볼 법한 근사하고 독특한 정자 두 개에 온갖 예쁜 꽃들과 잔디가 펼쳐져 있었고, 아래로는 절벽이 펼쳐져 있어서 새벽 어스름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날 정자에 앉아 스님이 주시는 차를 마실 때면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을 정도로 너무나 근사한 곳이었다.


물론 오랜 세월이 흘러 추억을 좇아 해인사를 들러 지족암에 다시 갔을 때는 모든 정원과 정자, 예쁜 꽃, 잔디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지만 일타 스님의 상좌였던 향적 큰스님께서 주지 스님으로 계시며 보통의 절 모습으로 새로이 공사를 하시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이해 가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련한 풍경들이 사라져 있음에 헛헛함을 느끼며 돌아오기도 하였었다.


그래,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 그래도 기억 속 추억들은 남아 있었다. 아련하고 애잔하게.


18년 전 일이었지만 아무에게도 이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지족암에는 기거하시는 스님 몇 분 외에도 37의 어느 세련된 여성분이 큰절인 해인사 본찰에서 일을 하시며 지인이셨던 당시 해인사 주지 스님의 추천으로 일이 끝나고 상주하는 곳은 지족암에서 거처를 정하게 되었다.


아침과 저녁을 함께하고 이따금씩 차도 마시며 작은 가족 같은 사이로 지내게 되었는데, 많이 친해지고 나서 사연을 들어보니 자신은 미대를 나와 회화를 전공하였는데 당시 미대 교수님과 오래도록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들었다. 그는 팔이 하나 없었는데 연민의 감정도 꽤나 있었던 듯하였다. 해인사로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의류 사업을 오래 하다가 사랑하던 미대 교수와의 사이를 정리하면서 하던 사업도 접고서 바람도 쐴 겸 지인이셨던 해인사 주지 스님의 추천으로 잠시 이곳에 일도 하고 휴양도 하려고 온 것이었다.


혈기 왕성하고 감수성이 풍부했었던 그때의 나는 조금씩 친해지던 14살이 많던 그녀를 어느덧 좋아하게 되었고 많이 외롭기도 했었던 그곳에서 수행을 하러 갔던 그곳에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그녀도 나를 많이 좋아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감정이 아닌 연민의 감정과 함께 그저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좋은 감정일 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행자 생활을 하던 근 1년 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었다. 스님들, 신도님들, 심지어는 큰절인 해인사 본찰에도 나의 존재가 알려지며 많은 기대와 큰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결국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사랑에 빠지고 상처받은 채 결국은 그곳을 떠나 불국사에 좀 더 머무르다 사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물론 1년 7개월간의 절에서의 행자 생활은 내 인생에 있어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기억과 배움, 그 후에 펼쳐진 내 삶에 많은 밑거름들이 되어주었기에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우리네 인생은 모두가 각자가 써 내려가는 한 편의 드라마가 아니겠는가. 나는 어느 드라마 속에서 많이 철없고 자유분방하고 때로 어리석고 무책임하고 많이 감성적이었으며, 또한 여리고 강하고 바보 같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한 마리 새끼 강아지와 고양이였던 듯하다.


지족암이 가진 의미는 “나는 오직 스스로 만족함을 안다”라는 뜻이다.


절에서 내려온 지 17년이 흘렀다. 그동안 좌충우돌 많은 것들이 부족한 삶이었을지 모르나, 반대로 그 많은 부족함들이 부족함으로 남지 않게 해 주었던 것은 어쩌면 그때에 배웠을지도 모를 작은 것들에도 만족할 줄 아는 삶의 자세가 아니었을까.


다시 과거의 어느 때로 잠시나마 돌아갈 수 있다면,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동이 터오는 새벽 어스름에 그 근사한 정자에 앉아서 펼쳐진 절벽과 산세를 바라보며 스님이 따라주시는 차를 한잔 마시던 그때로 돌아가,


기분 좋은 향이 피어오르는 따스한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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