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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송현 Oct 29. 2024

글로벌 발음기호로서 훈민정음의 가능성(1)

한글은 훈민정음이 아니다

한글은 훈민정음이 아니다


훈민정음은 한글의 원본 모습으로서, 훈민정음으로 보면 과거의 한국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소리도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훈민정음이 근대 한국어로 진화하면서 사용되지 않는 몇가지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기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조 표기법도 사라져 버렸죠.

만일 우리가 훈민정음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f,v,th 등의 소리가 존재하지 않아 국적불명의 이상한 소리를 내는 해프닝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훈민정음의 소리를 잃음으로서 한글 언어 표기의 복잡도 또한 증가했습니다. 미국에 사는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실제 발음과 표기의 차이점은 설명하기가 정말 곤란합니다. 그냥, "그게 더 편해서 그렇게 바뀌었다" 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있었다 - 발음은 [이써따] 가 됩니다. 있어 가 [이써]로 발음되는 건 기존의 연음법칙으로 설명이 됩니다. 그냥 초성의 ㅇ은 발음이 안 되니 받침의 소리를 가져 온다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었다 가 [어따]가 되는 건 어떻게 설명하죠? 일단, 었이 왜 [얻]의 소리를 내야 하는 거죠?

이 소리의 변경을 훈민정음 식 발성으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었'이 [어ㅆ]로 발음되고, 연음 법칙에 의해 ㅆ다가 발음되는 겁니다. 그럼, 혀로 이를 세게 막는 [ㅆ]의 초성 혀모양과 입천정에 혀를 대는 [ㄷ]의 혀모양을 모두 발음할 시, [ㄸ]의 발음이 나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외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말 그대로 었다는 [어ㅆ다]로 발음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썼던 "었" 이라는 글자는 사실 [얻]으로 발음할 것이 아니라 [어ㅆ]로 발음되어야 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훈민정음을 쓰는 그대로 발음하는 것은 또 다른 가능성을 낳습니다.


gas를 한글로 발음해 보죠. "개스" 혹은 "가스" 라고 발음할 겁니다. 그런데 이 표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바로 "ㅡ" 발음이 실제 소리값을 가진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사실은 gas와 "가스"의 발음에 커다란 차이를 만듭니다. 

영어의 "gas" 는 1 syllabal, 즉, 1음절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그걸 "가스"로 쓰는 순간, 이 단어는 2syllabal의 단어, 즉 2음절의 단어가 되어 버립니다. 영어 교육에서 음절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러한 음절 차이 때문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생각보다 흔하지요. 

위 "ㅡ" 발음이 우리 나라에서는 자음의 기본 소리값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ㅡ"는 분명한 소리를 가진 모음값입니다. 따라서, 자음만 발음할 때는 성대에서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합니다.

한글에서 이렇게 입모양만 바뀌고 소리를 내지 않는 글자 단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바로 "받침"이지요. 하지만 근대 한국어에서는 이 "받침"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앉다": [안따]

"앉": [안]

"높다": [놉따]

"높': [놉]

"같다": [가따]

"같": [갇]

"빨갛다": [빨가타]

"갛": [갇]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ㅅ,ㅋ, ㅌ, ㅎ, ㅍ, ㅈ, ㅊ, 그리고 수많은 겹자음이 제대로 발음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걸 설명하는 것도 어렵기 그지 없습니다. 단어의 원형을 알아야 하고, 그 원형에서 파생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그 발음과 차이가 나더라도 그렇게 쓴다 - 그렇게 가르칠 뿐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요?


저는 이 모든 것이 본래의 발음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로서, 사투리에는 원형의 발음법이 많이 존재합니다.


"일 없수다": [일 업쑤다]

"일 없다" -> [일 업ㅅ다] -> 일 업수다 -> 일 없수다

"이 아-가 그 아-가?"(경상도) : 이 아이가 그 아이냐? [이 아<..>가 그아<..>가?] (<..> 는 훈민정음에서 성조를 표현했습니다. 위로 올렸다가 내리는 소리로, 훈민정음에서 글자 좌측에 점을 하나나 두개로 표기했었습니다)

"높아불그만": [노파불그만] - 높아버리는구만 - 높구만

"넓어부리는구만": [널버버리는구만]


우리 말에는 수많은 어미(:말꼬리)가 존재합니다. 우리 말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고, 더 많은 문맥을 제공하는 유용한 특성이지요.

하지만, 언어 교육의 측면에서 "기본형"(-다)의 필요성에 대해서 의문이 듭니다.


만일,우리가 받침의 발음법을 잃지 않았다면, 과연 기본형이라는 것이 필요했을까요? 그냥 상황에 따른, 목적에 따른 어미만 있었다면 될 일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다" 라는 기본형 문장이 쓰이기나 하나요? 글을 쓸 때, 말을 할 때, 기본형 문장은 가장 쓰이지 않는 형식입니다.


"철수가 학교에 가다/철수는 학교에 가다"

"철수가 학교에 간 날이 언제니?"

"철수가 학교에 가고 얼마나 되었지?"

"철수가 학교에 갈까? 가지 않을까?"

"철수가 학교에 갈건 지 물어봐 줄래?"

"철수가 학교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철수는 학교에 갔거든?"

"철수가 학교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어."


위 문장에서 가장 쓰이지 않는 문장이 어떤 문장인가요? 우리가 "기본형"이라고 부르는 첫 문장일 겁니다. 쓰기에도 애매하고, 말하기에도 애매합니다. 애매하기 보다 어색하죠.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어색한" 기본형을 배워야 하나요? "가" 라는 단어 자체가 영어의 "go" 처럼 모든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요?


겹자음 받침을 사용하는 몇 가지 단어들도 봅시다.

잃다: [일따]

잃: [일]

잃어버리다: [이러버리다]

핥다: [할따]

핥: [할]

핥아: [할타]

긁다: [극따]

긁어: [글거]

긁는: [긍는]

맑다: [막따]

맑은: [말근]

맑아: [말가]


위의 기본형을 먼저 보죠. 단어가 "잃다"인데, 기본형의 발음인 [일따]는 원래 단어의 "잃"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발음하기 위해서는 [일ㅎ]와 같이 발음되어야 합니다. [일]뒤에 [ㅎ]발음을 [ㅡ] 없이 발음해서 그냥 바람만 빠져나오게 발음하는 거죠. 그럼, 잃다는 다음과 같이 발음될 겁니다. [일ㅎ다]. 저는 이렇게 발음하는 것이 원래의 발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훈민정음이 그대로 살아남았다면, 그리고 그 발음법이 그대로 전해 내려왔다면, 예외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훈민정음은 소리나는 대로 적은 일종의 "발음기호"였기 때문입니다.

핥다도 마찬가지 입니다. [할따]로 발음하는 대신, [할ㅌ다]로 발음해야 글자가 가진 본래의 발음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핥"는 [할ㅌ]로 발음되고, 그에서 파생되는 모든 어미는 본래의 소리를 간직한 채, 각 문장의 의미에만 신경써서 표현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한글교육도 마찬가지로 매우 쉬워졌겠지요. 

"맑다" 같은 경우에는 더 심합니다. 표준 한국어에서는 "맑다"를 [막따]라고 발음합니다. 아니 왜? "잃다"의 경우에는 "ㄹㅎ"에서는 앞에 있는 "ㄹ"을 선택하고, "ㄹㄱ"에서는 뒤에 있는 "ㄱ"을 선택한다고? 왜요? 이러한 불일치 때문인지 어떤 사람은 [말따]라고 발음하기도 합니다. 둘 다 싫으면 [말]뒤에 목구멍을 좀 막고 [따]를 발음합니다. 발음이 되지 않은 [ㄹㄱ]을 발음하려고 노력하죠(이전엔 이게 맞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틀렸다네요). 하지만 이러한 혼란은 애초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ㄹㄱ를 그대로 발음할 수도 있었는데 조금 편해지자고 그 둘 중 하나를 고른 건 대체 왜 그런 건가요? 내심 짐작가는 바는 있지만 확실히 알 수 없으니, 그저 속으로 혀만 찰 뿐입니다. 물론, ㄹㄱ의 발음을 제대로 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우니 이렇게 발음하는 것과, 아예  표준 발음 자체를 바꾸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건 fasion을 [패션]이라고 쓰지만, 원래 발음은 [ ˈʃn]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예 원본 발음이 패션이고, 단어는 fasion이라고 우기는 수준입니다.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교과서에서 로버트라고 쓰고 진짜 Robert가 자기 이름을 "롸벝"이라고 하면 걍 "로버트"라고 해. 라고 한다고 하더군요. 어색하다고요.) 


다음 글에서는 훈민정음의 위력과 유연성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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