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의 위력과 유연성
발음기호로서의 훈민정음은 근대의 한글을 아득히 뛰어 넘는 기능성을 가졌습니다. 한국말의 소리를 소리 나는대로 쓰는 것을 넘어, 수 많은 외국의 언어들까지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 혜례본에서는 집현전 학자 정인지가 한글이 동물의 소리나 자연의 소리까지 모방할 수 있다고 설명했죠.) 특히 없어진 글자들은 영어, 아랍어, 중국어와 같은 완전히 다른 발음 시스템을 가진 언어들까지도 어느 정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막말로, 훈민정음을 사용하면 그들의 발음을 그들보다 정확히 후대에 변형 없이 옮길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인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이 언어를 시작할 때 겪게되는 phonics(발음 교육) 교육의 난이도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건 입과 목이 움직이는 기본 원리 뿐일 겁니다. 하지만 기존의 발음법은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따라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집니다. 성인 교육의 경우 더욱 힘들어 집니다. 하지만 훈민정음의 수학적 발음 합성법은 이 어려운 발음교육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실 영어와 한국어의 1:1 mathing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언어도 마찬가지 입니다. 영어를 예로 들면, 자음에도 유성음, 무성음이 있고, 우리 말에서 모음이 있어야 소리나는 것이 영어에서는 자음 자체로 소리가 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문장이 되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훈민정음 혜례본의 창제 원리에서도 말하듯이, 그 언어의 기원이 다름과 관계 없이 어차피 입과 목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기본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입으로 만들 수 있는 소리라면 훈민정음이 표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어의 fan 발음을 가르친다고 해 봅시다. 정확하게 같지는 않지만 팬과 휀의 중간 발음 정도가 됩니다. 이를 겹자음으로 표현 시 ㅎ풴 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발화 시 나오는 바람의 세기와 열린 입술의 크기 등이 비슷하기에 발음은 비슷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ㅍ에서 표현하는 "입술이 닫혔다가 열리는 모양"과 f에서 사용하는 "윗니가 아랫입술에 살짝 닿은 모양"의 차이에서 나오는 미묘한 차이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여기에 더 알맞은 훈민정음의 자음이 있는데, 이는 ㅿ(반치음/반시옷)으로, 영어의 [z]와 비슷한 소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ㅿ"가 윗치아와 관련된 소리라는 것이죠. 이러한 원리를 돌아 보았을 때, f를 위해 "ㅿㅎ"와 같이 표현하면 쉽게 윗니를 아랫입술에 대고 ㅎ를 발음하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v는 "ㅿㅂ", th는 "ㅿㅅ"혹은 "ㅿㄷ"가 될 겁니다.
훈민정음은 성조조차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영어에 accent가 존재하듯이 우리 말에도 톤의 높낮이가 뜻에 영향을 주는 '성조'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interesting을 훈민정음으로 표현 시, 첫 i에 붙은 강세에 성조를 넣어 [인<.> 떠 ㅇ뤠ㅅ ㄸㆍ(아래아)ㆁ(꼭지이응)] 또는 [인<.> 떠 ㅇ뤠ㅅ ㅇㆍ(아래아)ㆁ(꼭지이응)]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ㅅ 다음에 오는 ㅇ는 영어의 묵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ㆍ(아래아)는 ㅡ와 ㅏ의 중간 정도 소리라고 하지만 사실 "ㅏ"인지 "ㅓ"인지 구분이 좀 힘듭니다. 제 뇌피셜로는 모음 중 가장 작은 점, ㅡ와 ㅓ의 중간이라고 표현되는 점, 낮은 소리가 난다는 점을 보아, 입을 자연스럽게 혹은 어중간하게 벌린 채 목구멍의 소리만 낸 소리였다고 생각되며, 그 당시 사람들도 쉽게 구분하기 힘들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자음과 모음을 잇는 모음 소리를 정하기 어려울 때 어중간하게 발음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insteresting에서 ting 부분이 [띵]처럼 입모양이 확실히 만들어지지 않고 약간 얼버무리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때, 아래아가 부활되면 자음과 받침만 확실히 발음할 때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ㆁ(꼭지이응)은 현재의 받침에 들어가는 ㅇ 받침이 그대로 쓰일 수는 있지만 목구멍을 막는 이응의 발음에는 원칙적으로 꼭지 이응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냥 ㅇ은 목구멍이 열린 채 그대로 두는 ㅇ으로 만일 꼭지이응이 복원된다면 받침에 있는 ㅇ은 소리가 길게 늘어지는 것을 표현 시 쓸 수 있습니다. 즉, 앙 은 [아-]와 같이 소리가 날 겁니다. 현재의 한국어에서 길게 소리가 날 때, [아-]를 표현하기 위해 [아아]를 사용할 텐데, 사실 [아, 아] 두번 발음하는 것과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받침 발음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설은 아니니 적당히 가능성의 하나라고 생각해 주세요)
표준 한국어 - 정확히 말하면 표준어가 된 경기도 사투리에는 성조가 없어 우리 말에는 그런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경상도에는 아직도 "성조"로 뜻을 파악하곤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아이"를 아<..>라고 발음합니다. 제 생각에 지금 우리가 영어 단어를 한국말에 섞어 쓰듯이 중국어에서 전해진 단어를 성조까지도 그대로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지칭하는 "아<..>"는 중국어의 "兒(아이 아)"에서 온 듯하고, "그놈의 자식"을 "그노마<..>"="그놈아<..>(兒)", "얼라<..>"(=어린아이=어린아(兒)), "가시나<..>=가스나(계집아이)=가슨아=갓(여자를 뜻하는 순우리말)은아" 와 같이 수많은 예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좀 많죠. (재미있는 사실은 만다린에서는 아기(嬰兒)를 잉어- 라고 발음하고 광둥어에서는 잉애라고 발음합니다. 응애, 잉애, 비슷하지 않나요? 만일 응애가 여기서 나왔다면 아기는 태어날 때 "아기!" 하면서 태어난 다는 얘기가 되니까요. 동시에 우리가 아이를 '애'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이 아'라고 발음하기도 하는데, 둘 모두 지역에 따른 차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단 중국어의 성조와는 조금 다른 게, 중국어에는 1,2,3,4성조가 있고, 광동어는 9성조 가 있지만 우리는 3성조밖에 없다는 겁니다. 중국어(maindarin/보통화)에서 兒는 2성으로, 높이가 낮았다가 높아집니다. 경상도 발음에서 아<..>는 높았다가 낮아지죠(중국어의 성조로는 4성에 해당합니다). 훈민정음에 기재된 성조는 일반 톤(1성), 강세 톤(점 하나-3성), 높았다가 낮아지는 톤(점 두개-4성)입니다. 兒처럼 낮았다 높아지는 건(2성) 없죠. 그래서 바뀐 건 지, 아니면 사투리에서 쓰이는 게 원본 소리이고, 중국에서 쓰이는 게 변경된 건 지, 그건 알 수 없겠죠. 또 하나 이상한 점은 대부분의 중국어 발음은 광둥어에서 왔는데, 이 발음인 "아"는 오히려 북방계 언어인 "보통화"와 더 비슷하다는 겁니다. 물론 국경이 맞닿아 있어 서로 영향을 많이 받았겠지만 이 부분에서는 논란의 여지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쓰는 한자 발음이 원래의 발음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미루어, 광둥어가 변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의 핵심에서는 빗겨난 문제이니 넘어가죠. 하지만 이러한 우리 말에도 성조가 있었고, 훈민정음에서는 이를 표현할 방법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점입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90년대 후반~2000년 초반) 한창 채팅과 커뮤니티등이 발달함에 따라 언어를 장난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말 줄임 현상과 새 단어 형성 현상은 존재하고, 오히려 가속화 되었죠. 이러한 언어의 변형은 언어의 자연스러운 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줄임과 변형은 그 원본을 짐작하는 데 어려움을 주죠. 오랜 시간동안 변형 된 신조어의 경우에는 그 역사를 알고 보면 정말 혀를 내두를 만큼 창의적이고, 어떨 때는 정말 어이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어의 변형은 그 나이 또래의 문화에서도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어른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문맥상의 이해가 필요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러한 이해 상의 문제는 젖혀 두고, 그 창의성에 집중한다면, 한글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한 힌트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일례로, 우리는 재미로 한글의 ㄷ, ㅅ, 또는 ㅆ발음으로 발성해야 할 곳에 th을 붙이곤 했습니다. 실제 th가 들어간 영어단어를 표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발음을 재밌게 하고 싶었을 뿐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가 한글의 창제원리에서 비롯된 자유도가 얼마나 높아질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ㅿ(반치음)과 같은 자음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지금처럼 한글의 조형이 제한되지 않았다면 아마 훈민정음 조형법으로 수많은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다음글에서는 훈민정음의 한계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