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랑 맥주 한 캔
시 한편으로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느꼈다. 사람을 먼저 만났으면 어땠을 지 모르지만, 글을 먼저 만난 덕에 이렇게 좋아졌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글 잘 쓰는 공대생에게 끌린다. (이훤님은 조지아공대에서 기계공학 전공하신 시인이자 사진가)
놀러와
이훤
나는 아홉살이 되었습니다
이준이는 나의 가장 친한 동생
엄마는 나의 가장 큰 집
엄마는 눈꺼풀이 얇아서 자주 웁니다
너에게 좋은 것을 줄게
말하면서 울고
자전거 타는 나를 보며 웁니다
넘어지는걸 두려워하면 안돼
넘어지면서 배우는거야
엄마는 카메라에 찍히는 사람
엄마를 모르는 사람들이 엄마를 기억합니다
작년에는 너무 빠르게 자라는 이준이와 나를 보며
엄마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많이 많이 기억해 놓을게
많이 기억하는 어른은 슬퍼지나 봅니다
엄마는 크게 웃고 많이 웃습니다
눈 내리는 것처럼 웃어서
우리를 다 덮습니다
레고 블럭처럼 우리는 쌓이고
카메라 속에서 다시 조립되는 중입니다
이준이가 차를 두 번 엎질렀는데
엄마는 세번째 차를 내려줍니다
엄마가 셋 셀 동안 그만하라고 했는데
나는 자꾸 늦습니다
엄마가 해준 말을 모았더니
커튼이 됐습니다
형아는 첫번째 아기라서 소중하고
너는 마지막 아기라서 소중해
커튼을 잘라
방안에 불빛을 만들었습니다
신우야 이준아
너희의 모국어가 될게
엄마라는 나라에 계속 놀러와
엄마를 배우는 동안 내가 아는 지도가 늘어납니다
나는 그 나라를 좋아합니다
내가 제일 그리운 표정들은 다 거기에 삽니다
엄마도 여기 계속 놀러와
그냥 놀러와
이훤님이 연예인 김나영님과 그녀의 두 아이 신우 이준이에게 선물한 시였다. (시 선물이라니…너무 좋다.)
오랜만에 사람에 대해 궁금해져서 이훤님의 책을 찾아 읽었고 이훤님이 사랑하시는 이슬아님의 책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두 분의 글 속에서 왜 서로를 사랑하게 됐는지를 이해하게 됐다. 그 글들을 읽으며 마음이 계속 어머 어머 입틀막했다.
5월 북큐레이션은 이훤님의 ‘눈에 덜 띄는’ 으로 정해서 보냈다. 그리고 어제 오늘 틈틈이 이슬아님의 책을 읽었다. 책 읽으며 이렇게 소리내어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 되게 낯설었지만 자꾸 소리내어 ㅋㅋㅋ 웃게 되었다. 특히 군부대에서 북콘서트 한 얘기와 어린이들 사이에서 태권도를 배우며 관장님과 아이들을 관찰하여 쓴 얘기와 K-요가수업에 대한 얘기에서 그랬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밥을 해줄 시간이 되어서 책을 덮었다. 아이들에게도 불금이 필요하니 금요일에는 학원 없이 실컷 놀게 해주기로 한 내 결정이 새삼 뿌듯했다. 봄바람 잔뜩 묻히고 돌아온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야금야금 주방에서도 계속 읽었다. 전자렌지를 돌려놓고 읽고 에어프라이어를 돌려놓고 읽었다. 밥을 차려주고 밥 먹는 아이들 옆에서 읽었다.
맥주 한 캔을 땄다. 금요일 저녁 식사에는 맥주를 한 캔 따고 싶은 유혹과 늘 싸운다. 예기치 못한 이번 한 주를 잘 살아낸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거다. 술을 입에 대지도 않던, 선교단체에서 훈련 받던 대학 시절을 지나 언젠가부터 술을 마시게 되었다.
내가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잘 아는, 불알은 없는 나의 불알친구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가끔 너랑 맥주 한 캔 하고 싶을 때가 있어’
시작은 그랬지만, 그 친구랑은 아니어도, 나는 가끔 나랑 맥주 한 캔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
타이밍이 절묘한, 운명같은 기회에 표정관리가 안 되어서 지인이 무슨 좋은 일 있냐고 알아챌 정도로 기뻤던 어제 오전을 지나, 아니길 바랬던 일이 일어난 절망스런 어제 밤을 지나, 민서의 주치의셨던, 은퇴한 교수님이 우리집과 멀지 않은 어린이병원에서 다시 진료를 시작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병원에 찾아가 진료를 볼 수 있었던 오늘 아침을 살아낸 나랑.
노트북 어답터를 두고 와 아이들 재워놓고 나왔다. 내가 주로 일하는 스타필드 1층 스타벅스에 가는 길이다. 10시면 문 닫으니 걸음를 재촉하면서도 마음이 느긋하다. 밤이고 길에는 봄꽃이 피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