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는 아직 그 창가에 앉아 있을까

by 서담

고양이 사진을 한 장 받았다. 창가에 앉은 모습이었는데,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미모가 수려했다.


고양이의 눈은 청포도알처럼 연둣빛이었고, 온몸은 짙은 회색 털로 덮여 있었다. 짧지만 윤기가 흘렀고, 촘촘한 빗으로 빗은 듯 가지런했다. 고양이 옆에는 선인장 화분이 두 개 놓여 있었는데, 선인장의 얇고 하얀 가시와 고양이의 하얀 수염 몇 가닥이 묘하게 닮아 있었다.

‘나를 쓰다듬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하지만 찔릴 각오는 되어 있겠지?’ 고양이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고양이 카페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다치고 버려진 고양이들을 데려다 돌보는 곳이었다. 눈이 한쪽 없는 고양이, 다리 한쪽이 없는 고양이도 있었다. 우리가 다친 사람을 보면 순간 놀라듯, 고양이에게도 그런 반응을 보이게 됐다.


게다가 고양이는 애초에 강아지처럼 사람을 반기거나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존재가 아니었다. 고양이 카페에서 보낸 두 시간 동안, 시종일관 ‘나는 너에게 관심 없어’라는 태도였다. 가끔 제법 먼 거리에서 슬쩍 나를 흘겨볼 뿐이었다.


강아지 카페에 갔을 때 처음 만난 강아지가 내 무릎에 앉아 갖은 애교를 부렸던 기억이 있어, 괜히 섭섭했다. 반려동물을 키운다면 고양이보다는 강아지 쪽이 낫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고양이가 가진 신비한 매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매혹적인 눈빛, 그 요염한 자태.


중국에 살던 시절, 1층이었던 우리 집 창가로 매일 찾아오던 고양이가 있었다. 이름은 ‘만두’였다. 생선토막을 주면 창가에 앉아 조용히 먹고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만두가 친구를 데려왔다.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였다. 생선을 내밀자, 만두는 나눠 먹지 않고 그것을 모두 친구에게 양보했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 검은 고양이는 새끼를 배고 있었다.


둘은 날마다 우리 집 창가에 와서 생선을 먹고, 햇살을 받으며 한숨 자고는 유유히 떠났다. 그렇게 반 집사로 지내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아이들은 만두를 만나러 중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고양이를 보러 중국에 또 갈 일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만두가 아직 살아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떠난 뒤, 그 집에 들어온 사람들도 만두에게 생선을 주었을까? 만두가 새끼를 밴 친구를 데리고 와도 좋겠다고, 여기서는 안심하고 눈을 붙여도 괜찮다고 생각할만한 사람들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고양이를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저 아이는 찔릴 각오 없이 쓰다듬을 수 있을까?

만두처럼, 친구에게 생선을 양보할 줄 아는 고양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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