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걸 아프다고 말하기까지

by 서담

강직성척추염 때문에 허리가 아프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늘 그래왔듯 참으면 지나가겠지 싶었다. 그렇게 반 년이 흘렀다. 그러다 오른쪽 다리가 저리기 시작하더니 절뚝이기까지 했다. 그제야 병원을 찾았다.


엑스레이를 찍고 MRI까지 찍고 나서야 알았다. 전문가가 아닌 내 눈에도 보일 만큼 디스크가 삐져나와 신경을 누르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1. 수술

2. 시술

3. 보존적 치료


하지만 나는 이미 강직성척추염 때문에 소염진통제를 꾸준히 먹고 있었고, 사실상 보존적 치료는 해본 셈이었다. 병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시술을 권하셨다. 의사 선생님은 길고 두꺼운 주사 바늘을 꺼내 보이며 설명해주셨다. 이걸 넣어서 디스크를 고열로 지지고 약물을 주입할 거라고.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시술 안 하고, 스트레칭이나 물리치료를 꾸준히 하면 나아질 수 있을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많이 진행된 상태라 효과가 거의 없고, 그렇게 버티다 디스크가 터지면 수술밖에 방법이 없을 거라고 했다.


상담실장님에게 1박 2일 입원과 430만 원 가량의 비용 설명까지 들은 뒤,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가뜩이나 바늘 무서워서 한의원 침도 싫어하는데, 그렇게 큰 주사 바늘을 두 눈으로 본 뒤에는 더더욱 겁이 났다.


덜덜 떨리는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그래 어쨌든 아픈 건 아픈 거였네.

아프면 아픈건데 나는 또 내가 아픈 것조차 의심했다. ​

의사 선생님이 진단해 주기 전까지는

이 정도면 참을만한 거 아닌가?

이 정도 아픔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하며 미루고 또 미뤘다.


만약 내 부모님이, 내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하며 아픔을 견디고 있었다면, 나는 아마 속상함을 넘어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 자신에게는 왜 이리 가혹한가.


‘폭싹 속았수다’에서 이런 나레이션이 나왔었다.

타인에게는 편지를 쓰듯 하면서, 가족에게는 낙서를 하듯 한다고.


나와 내 가족에게도 편지를 쓰듯 살 수는 없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도 편지를 쓰듯 대해볼 수는 없을까.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


나는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도움받는 걸 불편해한다.

그래서 지금 이 통증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건, 혹시 내가 나중에 주변 사람에게 짐이 될까봐 드는 두려움이다.

내가 가진 육체적인 연약함들이 마치 ‘쓸모 없음’의 증거처럼 느껴져서 더 힘들다.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는 애초에 서로 짐을 나누어 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건 우리의 한계이자 동시에 은혜다.

그런데 나는 이 사실 앞에서 자주 부딪힌다.

나는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하면서, 막상 도움을 받는 일에는 교묘히 회피하거나 불편함을 느낀다.

그 안에 교만함이 깔려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애니어그램 검사를 하면 늘 2번 유형, 조력자가 나온다.

‘도와주는 사람’, ‘관계 중심적인 사람’, ‘따뜻한 사람’이라는 설명이 따라온다.


“이들은 타인의 필요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도와주는 일에서 큰 만족과 자아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 쓸모 있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자리합니다.”


나는 이 설명을 읽을 때마다 내 안을 들여다 보이는 것 같다.


이번에도 몸이 아파서 힘든 것 보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더 고통스러웠다.

사랑받지 못할까 봐, 필요 없는 사람이 될까 봐.


하지만 이 고통의 순간이 알려주는 진실이 있다.

나는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쓰듯 살아왔지만,

이제는 내 자신에게도 그 편지를 써야 할 때라는 것.

있는 그대로의 나, 건강하든 아니든, 도움이 되든 아니든

그 자체로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할 때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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