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불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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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로부터 이제까지 제10의 뮤즈라 불릴 만큼 고혹했던 여인 사포 Sappho의 시 대부분은 흔적을 찾기 어려울 만큼 부서져 있지만 파피루스와 비석의 조각들을 모아 읽어보면 이런 글귀도 감성으로 폭발한다죠
"그 여자 오늘은 날지만 머지않아 남의 뒤를 따를걸
오늘은 선물을 받지만 머지않아 자신을 내줄걸
오늘은 사랑이 없지만 머지않아 사랑하게 될걸
비록 사랑하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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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이소라-트랙 11
그녀가 태어나 사랑하고 실연을 겪어 생을 마감한 바다는 에게해 동쪽 레스보스섬입니다. 사포의 흔적이 아니어도 그 섬에서 나는 올리브와 포도주 때문에 발길은 끊이지 않는 곳이죠. 여행지로 개발되지 않길 바라는..
사포는 여인의 수줍음이 미덕이고 여인의 인고가 덕목인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뱃사공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후 견디기 힘들어했습니다.
늘 사랑받고 칭송받고 주변이 다사로웠을 여인에겐 아픔이었겠죠. 우린 누구나 사포처럼 아픔을 견디기 싫어 아픔이 없는 세상을 희망하지만 그러기 전에 다른 이슈가 터져 실연을 잠시 유예합니다. 상처가 연기되는 것이죠.
비록 사랑하지 않고 비단 사랑받지 않아도 삶은 무인도가 아닌 이상 쌍방과실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지지고 볶이다 잊히거나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
말을 쉬어도 살아내기는 버거운 일상에서 (그렇다고) 이해를 구하는 건 아닙니다. 양해나 배려를 기대하는 건 우리 나이에 참 무모한 짓거리.
그냥..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이렇게 건조해졌나 싶을 때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Tú me abrasas, 2024)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목덜미가 바스락거릴 때 작가 /체사레 파베세/의 엔딩처럼 장엄해집니다. 숙연해지는 것이죠, 불쑥 오늘 하루가
그의 마지막 침대맡엔 너무도 자연스럽게 /레우코와의 대화/가 놓여있었고,
짧지도 길지도 않은 유연처럼 문장이 놓여 있었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다.
됐지?
너무 떠들지 말기를."
..
너는 나를 불태워.. 는 "나는 내가 아프다"는 롤랑 바르트 문장처럼 육화 됩니다. 몸에 들이쳐서 독소처럼 번지고 핏물이 되는 기분..
어디 나와 우리뿐이겠는가, 모두는 사는 내내 누군가를 마음으로 들끓이고 태우고 태워지다 나자빠진다는 것. 그것이 사포의 실연일 때도 있고 부모와의 사별일 때도 있고, 나 자신과의 배신이자 화해일 수도 있다고 엄동설한처럼 냉엄하게 실감해 보는 것이죠 Bom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