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오프닝처럼

아무것도 믿지 않는 여자와

by 봄작

인생 화양연화를 만들어준 이가 엄청나게 먼 과거에 있을 때 가장 힘든 건 시계입니다. 같이 걷고 먹고 바라보던 오후의 시간들, 아비와 소려진의 오후 3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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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이승철-소리쳐


풍운아 같은 <아비>가 <소려진>을 찾아와 1분이란 시간의 영원성을 가리킨 건, 오후 한 때. 그날로부터 소려진에게 오후 3시는 천국과 지옥의 뜀박질 같았을 겁니다. 왕가위 감독이 "가장 자연스러운 신체적 언어를 가진 배우"라 칭했던 장만옥이 그 심장의 진폭과 진동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냈던 영화.

<미셸 투르니에>의 말처럼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 덕분에 우린 아비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세상 보기 드문 애수를 구경했더랍니다.

사실 그런 뒷모습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나, 우린 우리의 등짝을 볼 수 없으니 나의 애수와 애련은 어떤 느낌일지 모르고요. 하나 아비의 지독히 쓸쓸한 등을 보면서 동질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 "인간은 왜 이다지도 거짓말에 약한가" 싶었던 것이죠.

연애란 말이 우주의 미발견 행성처럼 낯선 나이가 됐음에도 <류근>의 시를 두세 번 읽고픈 저녁이 있으니, 오늘인가 봅니다.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의 마지막 연은 당대 최고 아닌가요?


(상략..)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몸 버린다는 말이 마음 버렸다는 말보다 고귀하게 읽히는 참 파란만장한 저녁일세. (사실 저녁은 오늘의 거의 뒷모습이잖아요) Bo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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