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사원도 아니고 십 년도 넘게 붙박이 마냥 다닌 회사인데. 오랜 병가 뒤의 출근이어서인지 기분이 묘하다. 복직 3주 전 복직원계를 내고(행정적인 절차가 어찌나 복잡하고 까다로운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마음의 준비를 하려 했건만 웬걸. 받아놓은 날은 빨리 간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휙 지나가버렸다. 두근두근. 신입 사원 때의 해맑은 설렘과는 다르다. 긴장과 걱정, 불안이 뒤섞인 상태.
막상 출근을 하려고 보니 준비할 건 또 왜 이렇게 많은지. 벌거벗고 다녔던 것도 아닌데, 왜 입을 만한 옷이 없을까. 실상 복직이 아니어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모든 여자들이 공감하는 불가사의한 미스터리. 여하튼 2년 가까이 츄리닝과 맨투맨티, 운동화로 지냈으니 오죽하랴. 머리는 개성 발랄 마음대로 치솟은 짧은 곱슬, 옷, 구두, 화장품 등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총체적 난국, 올세팅이 필요했다.
혹시나 이렇게 신경 쓰는 걸 보니 예전에 패셔니스타였냐면, 전혀 아니다. 어쩌면 그냥 별 일 없이 쭉 회사를 다녔다면 적당히 입는다고 누가 신경을 쓸 것이며, 나도 별 생각이 없었을 텐데. 2년 병가, 다른 것도 아니고 중증 질환인 암에 걸려 아픈 사람. 괜스레 추레해 보이고 싶지 않고, 아파 보이고 싶지 않고, 약해 보이고 싶지 않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사람들에게 오히려 반전 매력으로 더 당당하고, 멋져 보이고 싶다. 돌이켜보면 이맘 때는 조금씩 회복을 해서 보기에 아픈 기색은 없었다. 심지어 친구들은 내가 징징거리는 저질 체력이, 보통 여자들의 평균치라고도 했다. 아마 마음속에 담아 놓은 암환자라는 꼬리표에 스스로를 매어놓았던 건지도.
먼저 머리, 깔끔한 이발(?)로 흩날리는 사자갈퀴 같던 머리를 정리하니 나름 흡족하다. 마치 연출한 숏커트처럼. 갑자기 추워진 날씨 덕에 옷은 겨울 니트와 바지로 적당히 커버하기. 신발이 애매하다. 항암치료와 항호르몬 치료 부작용으로 다른 곳도 아니고 발바닥이 이렇게나 아플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뒤로 구두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후다닥 집 근처 마트에서 편한 로퍼를 장만했다. 편한 신발 한 켤레에 마음의 평온과 자신감을 얻었다. 신데렐라라도 된 듯이. 마지막 화장은 과감히 포기. 원래도 잘 안 했지만, 2년간 노메이크업 자연인으로 살다 보니 도구도, 이를 활용할 능력도 없다. 여중생들의 하얗고 빨간 화장은 귀엽 기라도 하지, 애매하게 따라 했다가는 피에로가 될 게 뻔했다. 다행히 블랙마스크 덕을 톡톡히 보았다. 실은 진단 후 한동안 비타민디에 심취해서, 얼굴조차 선크림을 바르지 않고 해바라기 마냥 해를 찾아다녔다. '반려 기미'라는 새로운 취미 영역을 만들어낼 기세로 얼굴에 무수한 기미를 키워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만...
잠자리에 들기 전 알람을 맞춘다. 항호르몬제로 인한 불면증을 겪고 있지만, 아이들 등교에 맞춰 7시쯤 적당히 일어나면 됐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침 6시쯤 일어나서 1등으로 집을 나서야 한다. 다시 시작된 새벽 출근. 소중한 출근 준비 시간을 줄이기 위해 양말, 바지, 니트, 런닝까지 싹 챙겨두었다. 한동안 쉬었지만 몸에 밴 익숙한 습관.
출근 소식이 전해졌는지,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보게 되어서 기쁘다는 연락들이 온다. 나를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 밥벌이하는 사회 구성원으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 더불어 돈도 주고 삼시세끼 밥도 주는 곳. 그곳으로 두근두근 발걸음을 향한다. 그나저나 출근 버스 헷갈리면 안 되는데, 여태껏 버스도 제대로 못 타고, 회사에서 길도 못 찾다니. "아, 오해하시면 안돼요. 저 길치 아니에요. 케모브레인이라서 그런 거예요!" 이렇게 또 암경험자로서의 무기를 십분 활용해 본다.
후..하... 조금 긴장되지만 조만간 적응이 되겠지. 하루이틀도 아니고 몇 년을 다녔는데. 다만 암경험자로서 경험하는 첫 출근이니까. 첫날은 상견례처럼 조금은 긴장해도, 조금은 설레도 된다. 무엇보다 간절하게 찾고 싶던 예전의 평범했던 일상의 퍼즐을 채우러 가는 거니까. 이미 결정한 거니까, 즐겁게 맞이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