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유행했던 단어 '버킷리스트'. 좋은 말인 건 알았지만 딱히 와닿지 않았다. 정신없이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바쁜 나에게는 조금 먼 이야기로 느껴졌다. 암환자가 되고 어느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기 전까지는. ‘이제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라는 절박함과 '이제라도 하고 싶은 것 좀 해보고 살자'는 원망 섞인 기대감이 묘하게 얽혀 간절해졌다. 누가 바쁘고 힘들게 살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고, 못 하게 막은 것도 아니건만, 늘 동동거려야 했던 워킹맘으로서의 삶. 하긴 비단 워킹맘뿐일까. 전업주부도 마찬가지다. 늘 아이, 남편, 부모님 등 가족을 챙기느라 정작 본인들은 뒷전이다. 암 정도 되는 쎈 놈을 만나야 비로소 나를 바라보고 챙기게 되는 아이러니라니.
그렇게 불현듯 버킷리스트에 꽂혔다. 치료를 마치면, 건강해지면,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치료를 마쳐야만, 건강해야만 하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니니까- 한 개씩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소소한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누가 볼 것도 아닌데, 왠지 대단하고 멋있어야 할 것 같아 고민만 하다가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잊어버렸다. 복직 뒤로는 더더욱 시간에 쫓겨서(정확히는 저질 체력으로 가용 시간이 줄어들었다) 다른 걸 생각할 틈이 없었다.
병가 후 복직자로 첫 해 연차 0개, 다음 해 6개, 3년 만에 드디어 내 몫의 연차를 모두 획득했다. 평일에 쉴 수 있다!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휴가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런데 간절했던 자유의 시간이 생겼는데, 어디로 갈지 무얼 할지 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맨날 연차가 없다고 투덜거렸는데 정작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니 당혹스럽다. 그렇게 어리바리하는 중에 잊고 있던 '버킷리스트'가 생각났다. 어떤 일이라도 오랜 시간 기대하고 꿈꿔왔다면 훨씬 기쁘고 설렐 텐데.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스스로를 돌보겠다던 그 다짐은 어디로 간 건지. 이제는 진짜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야겠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암을 만나기 전에는?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에게 찾아 올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치료로 나의 몸이 내 것 같지 않아 슬펐을 때는? 복직 후 이방인이 된 듯했을 때는? 언제 암을 겪었나 싶을 만큼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은? 버킷리스트를 만든다는 건 단순히 하고 싶은 걸 정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오롯이 집중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포함한다. 삶에서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를 고민하게 되니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의 버킷리스트 1순위이자 장래희망.(초등학교 때 매년 영혼없이 적어 내던 기억 이후로 처음 써보는 단어 '장래희망', 이제는 진심으로 간절히 희망한다!) '빨간 원피스를 입은 귀여운 할머니'. 짧은 문구 안에 큰 욕망과 빅픽쳐를 담고 있다. (나는 다 계획이 있다!) 일단 그때까지 무탈하게 잘 살아있어야 한다. 일병장수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담은 철학적 표현. 할머니인데도 귀여우려면 외모도, 마음 관리도 잘해야 한다.
오랜 세월의 연륜을 품은 온화한 표정과 호기심 가득한 눈빛, 약간 통통해도 좋지만 너무 과하지 않도록 적당히 운동도 해야 할 테고. 무엇보다 인자한 표정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너그럽고 따뜻하게 살아온 삶의 흔적이 만들어내는 아우라. 빨간 원피스는 개성의 멋을 아는 유니크함과 동시에 다름에 대해 인색하지 않은 열린 마음이 담겨있다. 비록 딸은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의 표지를 꽉 채운 백발의 할머니가 연상된다지만, 그보다 더욱더 귀여워야 한다. 이번 생 예쁘기는 글렀어도, 노오력으로 귀여움을 쟁취하리라.
다 좋은데 이걸 이루는 순간의 기쁨과 성취감을 맛보려면 도대체 얼마나 걸리는 거지? 음...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 아니던가. 몇 십 년을 수련하며 오매불망 그것만 바라보기는 좀 가혹하다.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 보면 이루어질 꿈, 버킷리스트 0순위로 남겨두고 다른 걸 찾아본다. 거창할 필요도, 있어 보일 필요도 없다. 소소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데 미쳐 용기 내지 못한 것들.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며 읽고 쓰기, 디지털기기 없이 지내보기, 확 트인 전망을 바라보며 마시는 따뜻한 커피, 보고 싶던 영화&드라마 정주행하기, 딸과 맛집 데이트, 타인을 위한 작은 나눔, 마음을 담은 두 번째 책, 풀메이크업&파티룩, 스킨스쿠버 자격증 따기, 스카이다이빙, 자동차로 전국 일주, 중국 운남성 여행, 한도시 한 달 살기, 꿈을 향한 몰입과 성장에서 오는 기쁨, 마음과 현실 모두 부자 되기.앗, 이것저것 쓰다 보니 점점 웅장하고 스케일이 커진다. 이러면 빈도를 구현하기가 좀 힘들 수도 있는데. 에라 모르겠다. 상상하는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그 와중에 이미 입은 헤벌쭉. 이미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세계 여행을 떠났다.
가족들도 챙겨야하지만, 모두를 위해 가끔은 나를 위한 시간을 일부러라도 내어야겠다. '이제라도 하고 싶은 것 좀 하고 살자'던 다소 한스럽던 다짐을 긍정으로 승화시켜기.(거듭 말하지만 하고 싶은 거 하지말라고 바짓가랑이 잡은 사람은 없다!)잊을 때쯤 한 번씩 셀프 리마인드 하면서.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하다 보면, 또 다른 하고 싶은 일들이 생기겠지. 예상치 못한뜻밖의 일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삶은 원래 그런 거니까. 예전의 나라면 버킷리스트를 완성하고, 다 이룰 때까지 전투적으로 벽돌 깨기 하듯 몰입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해내야만, 목표를 이뤄야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니까. 내 마음에 귀 기울이고 상상하는 이 시간만으로도 행복하니까.
귀하게 얻은 두 번째 삶을 좀 더 특별한 시간으로 만들어 줄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