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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Dec 19. 2023

저는 암 경험자입니다.

4년 차 암 경험자의 '암 경험자' 소개

2020년 10월 유방암 진단 후 어느새 4년 차. 지극히 평범하던 삶에서 느닷없이 '암환자'가 되었다. 현대 의학에서 암 표준 치료라 불리는 '수술 - 항암 - 방사' 3종 풀세트를 마쳤지만, 다시 보통 사람1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대신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얻은 새로운 타이틀 '암 경험자'. 우리나라에 이미 200만 명이 넘는 암경험자가 있다고 소리 높여 설파하고 있지만, 아직은 영 어색하고 낯설다. (글을 쓴 뒤에 호기심에 찾아보니 22년 기준 우리나라 암경험자의 수는 243만명에 달한다.) 


보통 '경험'이라면 실연의 혹은 슬픈 처럼 별다른 수식어가 붙지 않으면 대체로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설렘이나 긍정적인 느낌이 나는데, 앞에 딱 한 글자 '암'을 붙였을 뿐인데 이토록 강렬하다니. 생각해 보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 즐거운 여행 경험, 힘들었던 직장 경험, 설레는 연애 경험, 그리고 암 경험? 응? 한 단어로 상황이 종결되는, 뭔가 편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아무리 그 수가 많아졌다고 해도 암은 여전히 무섭고, 완벽한 치료법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암 경험자라는 불변의 사실. 5년 차 검진을 통과해서 '의학적인' 완치 판정을 받더라도, 앞으로 평생, 나를 규정할 새로운 특성이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살면서 암에 걸릴 확률은 3분의 1이란다. 세 명 중 한 명. 일단 암을 진단받으면 암 경험자가 되고, 개념상 비가역성을 띄고 있으므로 암 경험자가 아닌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어쩌면 이 추세로는 20년 뒤쯤에는 암 경험자가 수적으로 훨씬 우위에 있을지도 모른다. 오해하면 안 된다. 절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설사 그렇게 된들 나에게 좋을 게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어쩌면 그때 이 글이, 수적으로 열세인 데다, 사회적인 인식마저 열악했던 초기 암경험자의 권익 향상과 인지도 개선에 이바지한 걸로 칭송받으며 역주행하는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르는?(워워. 여기서 스톱.)


왜 이런 신박한 단어가 생긴 걸까.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의학 기술의 발달로 암 진단 후에도 오래 사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어떻게 살릴까'하는 치료 중심의 접근이었다면, 지금은 그건 기본이고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암 경험자의 몸과 마음은 이전과는 다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암이 생겨난 이후부터 암 경험자는 쭈욱 존재했지만,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을 것이다. 암을 경험했다고 쉽게 드러낼 수도, 이제 치료를 마쳤으니 다시 예전처럼 열심히 살라고 파이팅을 외치는 이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웠을 테니까. 이 글을 빌어 그간 외롭고 힘들었을 암 경험자 선배님들께 세상은 점점 더 나아질 거라고, 우리 함께 하자고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응? 갑자기?)

  

개인적으로 매우 불편한 보험회사 광고 카피. "어머, 암이라고요? 헉!" 능력치 안에서 최대한으로 과장된 표정, 더 이상 크게 뜰 수 없는 눈, 흔들리는 동공,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는 말잇못 여자 배우. 암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무섭지만, 그 사실이 보험 판매 매출 증가를 위해 공포심과 위화감을 조성하는 용도로 쓰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암을 경험했지만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많은 암 경험자들을 위해서.


*새로운 경험으로 사고가 한 번 확장되면 

결코 그전의 차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by 올리버 웬델 홈스)

출허 : Pixabay


* 최근에 '암 경험자'외에 '암 생존자'라는 단어도 많이 쓰인다. 치료 이후의 삶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진 서구권의 'Cancer Survivor'의 한국어 버전. 평생 콤플렉스인 영어에 대한 환상 때문일까, 왜 'Survivor'는 멋있는데, '생존자'라고 하면 무섭지. 어쩌면 '생존=살아남음'이라는 뜻에 함축된 반대의 말이 연상돼서 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번역이 꼭 직역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값진 경험, 소중한 경험, 뜻깊은 경험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난 '경험자'에 한 표!


* 브런치 글 발행 키워드에도 역시나 '암 경험자'가 없다. 이래서 인식의 제고가 필요하다. 무려 전체 인구의 5퍼센트에 달하는데!!! 그보다 훨씬 수가 적은 각종 직업, 사물은 키워드가 있는데 뭔가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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