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대의 갭이어, 설레고 응원해!
"뭐? 육아휴직이라고? 설마 셋째"
마흔넷, 설마 너의 나이를 모르는 거냐 내지는 부부금실이 그렇게까지 좋았냐는 의혹의 눈빛.
"휴직하면 돈은 어쩌려고?"
대기업 20년 차, 나름 적지 않은 월급이기에 설마 그걸 포기하는 거냐는 눈빛.
혼자서는 꽤 오래 생각했지만, 20년 차 마흔네 살의 육아휴직 선언에 주변의 반응은 꽤 신선했다. 병력이 있다 보니 일단 재발이나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하는 걸 시작으로, 각종 질문과 의혹, 회유, 부러움이 뒤를 이었다.
(의혹) 혹시 재테크가 대박이 났냐, 나도 좀 알려줘라.
나도 로또, 코인 뭐 그런 걸로 대박 좀 나고 싶다!
(회유 1) 원하지 않아도 등 떠밀 릴(?)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 애들 중고등학교 가면 돈도 많이 드는데 굳이 왜 쉬냐.
아니야, 난 돌아와서 20년 받고 따블로 20년 더 갈 거야! 나의 의지를 의심하지 말아 줘
(회유 2) 원래 살림하던 사람도 아니고, 집에서 삼시 세 끼가 더 힘들걸? 한 달만 쉬고 돌아와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남이 해주는 밥' 먹자!
안 그래도 걱정되는 부분인데 그렇게 콕 집어서 말하면 조금 흔들리는데...
(부러움) 일 안 하고 쉬면 너무 좋겠다.
(만 12세 이하 아이가 있는) 너님도 휴직할 수 있어요! 돈은 벌고 싶고, 쉬고도 싶고 그건 아니잖아~
급여, 직장인이라는 사회적 타이틀, 결정적으로 남이 해주는 밥.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왜 휴직을 한 걸까. 그것도 무려 20년 차 마흔네 살에! 단순히 아이가 만 13세가 되면 더 이상 휴직을 할 수 없어서라기에는 뭔가 궁색하다.(회사의 여성 친화적 제도로 만 12세까지 육아휴직이 가능하다. 단, 무급) 그간 조커처럼 가슴에 품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22년 11월, 병가 후 복직을 할까 말까 고민만 수백 번. 바닥까지 내려간 자존감은 퇴사까지 고민하게 했다. 포기하기에는 아쉽지만, 이런저런 두려움에 주저하던 그때. 결국 복직으로 결론을 내리게 된 작은 발상의 전환.
'월급 반을 쓰고, 반을 남기면, 일한 기간만큼 다시 쉴 수 있는 거야! 어때? 해볼 만하지 않아?'
셀프 1+1 프로모션은 꽤 강력했다. 복직 후 2년을 잘 적응하며 직장을 다녔다. 당연히 월급의 반만 쓰면서. 돌이켜 생각하니 수년간 빅픽쳐였던 거? 혼자 소름.
물론 예전(암을 경험하기 전)의 나라면 휴직으로 놓칠 미래 소득에 대한 기회비용을 따지며, 웬 말이냐고 했을 것이다. 이제는 뭣이 중헌디를 읊조리며,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생각한다. 용기 내어 다시 사회로 복귀했고, 그 시간을 잘 견딘 나, 그리고 가족을 위한(복직 초반 나의 짜증과 감정기복을 받아낸) 선물을 하기로 결심했다.
의혹과 회유가 일단락되자, 계획표를 내놓으란다. 이미 휴직 중 할 일들과 일정 리스트가 있지 않냐며 닦달한다. 스스로 들들 볶으며, 에너지 영끌하던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주장해도 도무지 믿지 않는다. 진짜 아무 생각도 없는데. 여행으로 치면 일단 비행기 타고 보자 느낌이랄까.
물론 성실한 직장인으로 20년 만에 처음, 오롯이 나의 의지로 맞는 - 상당히 비자발적일 수밖에 없었던 병가에 비해 - 휴직이기에 설렐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적응하고 잘 지내긴 했지만, 아무래도 운동이나 식이는 소홀해졌다. 그런 면에서 고급진 표현으로 '나를 돌보는 시간'은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아, 병가 복귀자 신분이라 감히 할 수 없었던 여행도 실컷 가리라. 복직 첫 해 연차 0개, 그다음 해 6개로 이 악물고 버틴 짠한 추억. 이제 중학생이 되어 조만간 사춘기를 맞아 문을 걸어 잠그고 대화가 단절될지도 모르는 딸에게 좀 더 치대고 살살 꼬드기는 시간도 가지고 싶다. 무엇보다 앞으로 남은 인생(최소 50년) 즐겁고 재밌게 살거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딴짓도 해봐야 하고.
아무런 계획이 없었는데 쓰다 보니 할 일이 무궁무진하네~ 앗싸 신난다!
2년에 걸친 빅픽쳐와 실행으로 주어진 소중한 시간, 일명 '사십 대의 갭이어'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테고(삼시 세 끼 무섭),
단번에 원하는 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새로운 도전에 용기 낸 나,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설렘의 시간들을 응원해!
* 갭이어(Gap Year)
학업을 병행하거나 잠시 중단하고 봉사, 여행, 진로 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의 다양한 활동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통해 향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시간. 서구 국가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 전에 1년 간 다양한 경험을 쌓는 갭이어(gap year)를 가진다. 유명인 중에서는 엠마 왓슨과 해리 왕자가 갭이어를 가진 대표 사례다.
(첨언)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 가기 위해 죽도록 공부해야 하고, 대학에서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스펙 쌓아야 하고, 취직하면 결혼해야 하고, 결혼하면 아이 낳아야 하고, 아이 낳으면 빡센 워킹맘/대디의 삶을 사는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라이프 패턴상, 그리고 이미 사십 대의 아줌마인지라 10대의 갭이어는 바이바이.
근데 백세시대, 우리는 모두 제2의 삶을 살게 될 테니까. 어쩌면 푸릇한 십 대의 고민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대체로 다른 사람이 원하는 삶을 살아온 사십 대의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고민과 탐색은 더 밀도 있고, 치열하고, 열정적이지 않을까?